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7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7과 여성 인권신장의 선구자 안나 하워드 쇼

나효선 2017. 7. 31. 02:00

기독교대한감리회 2017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7과 성서적 관점에서 여성 인권신장의 선구자

안나 하워드 쇼 Anna Howard Shaw

 

       

           

        

* 성경봉독 : 갈라디아서 3:26~28

* 참고성경 : 시편 8:1~5

* 요절 :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목사이며 의학박사인 안나 하워드 쇼는 교회와 보스턴대학교의 성자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추앙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와 사회와 세계에서 여성 인권에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설교가와 예언자로서의 생을 사는 동안 그녀는 계속해서 사회정의를 위해 일했습니다. 안나는 펜타코스트(Pentecost)에서 “너희의 딸들은 예언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충실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안나는 1847년 2월 14일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1851년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처음에 매사추세츠로 갔지만 1859년에 그녀의 아버지는 가족을 미시건의 광야로 보내서 나무집을 짓고 살게 했습니다. 안나의 어린 시절은 어려운 일에 도전하는 개척정신과 매우 높은 ‘적극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안나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설교의 소명을 느꼈고 실제로 개척자들에게 설교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은 이 소명을 진지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녀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50년 여 년 전 작은 개척 마을에서 여성들이 할 수 있는 분야는 극히 적었고 결실도 거의 없었습니다. 내가 적성에 맞지 않는 가구 만드는 일을 한 달간 하고 있을 때, 만인 구제파의 한 여성 목회자가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마리안 톰슨으로 설교하기 위해 왔습니다. 난생 처음 여성 목회자가 강대상에 서는 것을 봤을 때, 그리고 그녀의 설교를 들은 그때, 내 영혼에 전율이 일어나는 멋진 순간이었습니다. 강력한 힘이 내게 작용해서 목회자 되는 것을 열망하게 되었습니다. … 하지만 가족에게 그 소망을 말했을 때, 그것은 모두에게 충격을 주어서 내가 설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미시간대학교에 보내 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결국 다시금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나는 설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알비온대학을 다니는 동안, 그녀는 마리안 톰슨과 참정권 확대론자인 메리 리버모어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 기간에 감리교 에피스코팔 교파의 한 장로의 눈에 들었는데, 그는 안수 받은 첫 여성 목회자를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안나는 1871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감리회 에피스코팔교회에서 설교 자격을 획득했고, 근처의 여러 지역에서 많은 설교기회를 얻었습니다.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확신한 안나는 알비온대학을 그만두고 보스턴대학교 신학부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남자 신학생들에게는 무료로 숙식을 제공했지만 그녀는 캠퍼스 밖에 살면서 식비를 벌기 위해 일해야 했습니다. 안나는 우유와 비스킷만으로 연명하면서 여러 번 아사 직전까지 갔습니다. 영양실조로 2층 강의실조차 단번에 올라가지 못하고 계단에서 자주 쉬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현재 보스턴 신학부의 2층 계단통로에는 안나를 기념하는 창문을 만들어서 계단을 오르는 이들이 그녀가 휴식을 취하면서 자신의 신앙과 소명을 재확인하던 그때를 추억하게 해 놓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신학교 시절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학교 클래스는 남자 42명과 여성은 나 혼자였다. 그래서 교실에 들어갈 때 내가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어느 때인가, 나는 펜타코스트 사건에서 예언이 뭐냐고 교수에게 질문하였다. 교수는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쓰였는지에 따라 다른데 신약성서에서 예언은 설교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펜타코스트의 때에 여성들도 설교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교수는 여성들은 그때 서로 말했을 뿐이고 설교는 남자들만 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남성과 여성이 둘이 말할 때 여성이 말하면 대화이고 남성이 말하면 설교가 되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교수는 우리가 다시 시작할 거라고 말했다.”

 

1878년에 안나는 보스턴대학교의 신학부를 졸업한 두 번째 여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리회 에피스코팔교회의 뉴잉글랜드연회에서 목사안수 받기를 거부했습니다. 대신 1880년에 감리회 계통인 감리교 개신교회의 뉴욕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첫 여성이 되었습니다.

 

안나는 매사추세츠 주 동데니스에 있는 웨슬리안감리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보스턴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녀는 39세에 사역을 넓혀서 목회와 치유사역뿐 아니라, 사회정의에 관련해서는 ‘주요 연설자’가 되어 절제의 이유들과 여성 참정권 확대, 그리고 평화를 위해 전 세계를 다니면서 단체를 조직하고 강연을 했습니다. 안나는 암스테르담, 베를린, 코펜하겐, 그리고 런던에서 설교한 최초의 여성 목회자였으며, 스웨덴 국가교회에서 설교한 최초의 여성이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1차 대전 중에 국가방위협의회의 여성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수훈장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고, 죽기(1919년) 바로 전에는 국제연맹의 옹호자가 되었습니다.

 

안나가 사회정의를 위해 헌신하였지만, 여성 참정권 확대운동에서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여성들의 참정권 확대를 위해 당시 세력을 가진 백인남성들과 함께 활동했는데, 이것이 흑인이나 소수 이민자들의 권리보다 백인여성들에게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하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여성의 인권뿐 아니라 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해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관점에서 노력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안나는 죽기 몇 달 전에 텍사스 주 와코에 있는 베일러대학교에서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이므로 여성들의 투표권도 당연하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성들은 사람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녀는 여성들이 참정권 확대운동에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연설을 끝냈습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일하던 안나는 안타깝게도 72세 되던 1919년, 미국의회가 여성들의 참정권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19번째 수정헌법을 인준하기 불과 몇 개월 전 펜실베니아 모일란에 있는 자택에서 폐렴으로 서거했습니다.

 

생전 안나가 행한 일들이 인정받아, 1989년 안나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부 최초 졸업한 여성인 안나 스노든 올리버(Anna Snowden Oliver)가 미국 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의 과거 연회였던 남뉴잉글랜드 연회의 정회원 멤버로 선출되었습니다. 특히 2000년에는 뉴욕 주에 있는 여성 인권의 탄생지인 세네카폴스의 여성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안나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여성의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한 것은 단순히 여성이 존중받지 못하던 시대에 여성도 인간으로 존중하고 높여야 한다는 신념에서만 행동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인권을 갖고 있다는 성경적인 신앙에 의해서 행동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녀의 말이 설득력을 지녔던 것은 신앙적인 확신에서 오는 힘이 실려 있었고,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웨슬리의 후예였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기독교 여성들이 사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2. 이런 역할 감당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7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웨슬리의 후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