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7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6과 평신도 설교자 로버트 스트로브리지

나효선 2017. 6. 26. 23:55

기독교대한감리회 2017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6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 평신도 설교자

로버트 스트로브리지 Robert Strawbridge

 

* 성경봉독 : 요한복음 21:15~19

* 참고성경 : 마태복음 28:18~20

* 요절 :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5)

          

     

 

      

로버트 스트로브리지는 미국의 첫 감리회 평신도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1753년 볼티모어 지역에 첫 감리회 신도회를 조직한 평신도였습니다. 그는 또한 여러 신도회들을 조직했고, 토착 미국인들을 처음으로 회심시켜서 복음 설교자들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유명한 설교가가 된 윌리엄 워터스, 필립 가천드, 그리고 감리회의 ‘폴 리비어’로 부르는 프리본 가렛슨이 있습니다.

         

스트로브리지는 1732년 아일랜드 드럼스나의 고트코넬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땅은 약 150년 전에 그의 직계 조상에게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스트로브리지는 영국의 제임스 왕이 아일랜드에 정착시킨 영국 농부 출신이었고, 따라서 그는 영국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불만 섞인 눈으로 바라보는 아일랜드 이웃들을 의식해서 아버지는 둘째인 그를 어머니 조상의 이름을 따라서 지었습니다. 아일랜드의 오랜 전통은 맏아들 이름은 아버지의 조상을 따라서 짓고, 둘째 아들 이름을 어머니 조상을 따라서 지었기 때문입니다.

 

로버트는 1756년 회심을 경험했고 그때부터 1758년 여름까지 드럼스나를 시작으로 영국 전역을 대상으로 영적인 순례를 계속했습니다. 로버트의 성품에 걸맞게도 그의 회심경험은 일반적인 것과 다르게, 이처럼 영적인 순례를 동반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멘토인 로렌스 쿠글란의 지도하에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쿠글란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봅시다. 영국인이었던 로버트와는 달리 쿠글란은 전통적인 아일랜드 사람이었습니다. 쿠글란은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교육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성경 말씀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웨슬리는 회심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쿠글란에게 순회사역을 맡겼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에 쿠글란은 뉴파운드랜드까지 가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쿠글란의 사역 초기에 고향인 드럼스나에서 첫 회심자들이 몇 명 나왔는데, 그 중 하나가 로버트의 동생 레오나드였습니다. 쿠글란의 복음적인 열정은 또한 로버트의 마음도 돌려놓았습니다. 로버트는 회심하자마자, 영적인 순례를 했고, 자기사업을 포기하면서 복음 전파와 설교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로버트는 제도화된 종교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로버트는 쿠글란을 따라서 감리회에 입회하였고 웨슬리의 지도를 받으며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로버트는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사랑을 갖고 열정적으로 설교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설교한 레이트림 카운티에서 많은 회심자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로버트는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식도 집례 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순회 사역자들의 성찬식 집례를 엄격히 금지하였지만, 로버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설사 그것이 규칙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로버트는 자신이 만나는 개개인에게 기독교적인 모든 것을 제공해주어야 한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로버트는 웨슬리 목사님을 거슬리게 되었습니다.

 

로버트보다 앞서서 관습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드럼스나에 있는 영국교회와 웨슬리 신자들은 로버트의 개인주의적인 활동이 매우 지나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버트에게 수개월 내에 떠나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저항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말을 타고 이웃 카운티인 슬리고와 킬모아에서 설교하고, 아르마와 테리후건까지 가서 설교했습니다.

 

1760년 결혼 후, 로버트는 많은 다른 아일랜드 사람들처럼 아일랜드를 떠나 아메리카로 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결혼 첫날밤, 신부에게 결혼식 때 사제가 한 말인 “결혼은 출산을 위한 수단”이라는 말을 상기시키면서 아메리카로 가서 아기를 낳자고 재촉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로버트는 먼저 슬리고로 이주했고, 1760~1766년에 메릴랜드 주의 프레드릭 카운티로 갔습니다. 그는 메릴랜드에 도착하자마자 설교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그는 미 대륙에 감리교를 전하는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프랜시스 애즈베리의 1801년 저널에 따르면, 로버트 스트로브리지는 1768년 뉴윈드셔 근처의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미국에서의 감리회 효시가 되는 첫 모임을 가졌습니다.

 

로버트는 뉴 윈드셔의 통나무집에서 설교하면서, 그 지역의 감리교 신도회를 빠르게 조직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로버트는 북아메리카에 감리교 신도회들이 설립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곧 메릴랜드 펜실베이니아 버지니아를 순회하는 설교를 시작했고, 많은 신도회들을 세웠습니다. 그는 매우 유명해졌고 많은 젊은 설교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772년 12월에 열린 회의에서 애즈베리 감독은 로버트 스트로브리지와 리처드 오윙스를 프레드릭 카운티 순회사역자로 공식 임명했습니다. 대부분의 평신도 사역자에게 그랬듯이, 로버트에게도 성찬식 집례에 대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1773년 아메리카 감리교 설교자회의는 평신도 설교자들에게 성찬식 집례를 금했지만, 로버트만은 예외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열정적으로 설교하면서 복음을 전하던 로버트는 1781년 원인모를 질병에 걸려 49세의 젊은 나이에 라이더우드에 있는 헌트 채플 근처의 휠러 농장에서 서거했습니다. 로버트의 장례예배는 그의 초창기 회심자들 중 하나인 리처드 오잉스가 집전했고, 시신은 휠러의 땅에 묻혔다가, 1866년에 그의 아내 시신과 함께 볼티모어에 있는 올리벳 산 공원묘원으로 이장되었습니다.

로버트 스트로브리지의 사역기간은 20년이 채 안 되었지만 미국에서 감리교의 확고한 기초를 세웠습니다. 따라서 미국 감리교회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짧은 생애에 비해 매우 컸습니다.

 

뉴욕과 메릴랜드는 150년이 넘게 서로 미국 감리회의 탄생장소라고 주장해왔습니다. 1860년 볼티모어 회의에서는 메릴랜드가 더 많은 표를 얻었지만, 미국 감리교회 100주년 기념행사는 뉴욕에서 창설된 1766년을 기준으로 1866년에 열렸습니다. 그런데 1813년 오하이오에서 사역하는 한 감리교 목회자가 1763년 메릴랜드에서 스트로브리지에 의해 회심했다는 독일 농부를 만났습니다. 이 증거는 미국 감리회의 기원이 메릴랜드임을 충분히 입증했고, 결국 1916년 교회는 메릴랜드가 감리회 탄생지라고 결정했습니다. 뉴윈서의 끝에 있는 메릴랜드 캐롤 카운티에 위치한 스트로브리지교회는 로버트 스트로브리지를 기념하고 그의 사역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신앙의 열정을 갖는 것이 왜 필요하고 중요한지 생각해 봅시다.

 

2. 신앙의 열정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면, 그것을 갖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7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웨슬리의 후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