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7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8과 캐나다 신앙의 어머니
바바라 헥 Barbara Heck
* 성경봉독 : 마태복음 16:18
* 참고성경 : 에베소서 1:23~24
* 요절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바바라 헥은 독일 이민자 후손으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첫 감리교회를 세운 웨슬리의 충실한 후예였습니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복음의 씨를 뿌렸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특히 캐나다에서 신앙의 어머니로 부를 만큼 캐나다 감리교회에 초석을 놓은 분입니다.
바바라 본 러클(바바라 헥의 결혼 전 이름)은 1734년에 아일랜드 리머릭 카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조상은 독일에서 박해를 피하여 아일랜드로 이주한 개신교도들이었습니다. 루이 14세 통치 하에 있던 프랑스 군인들은 종교개혁의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독일 남부를 약탈했습니다. 괴롭힘을 당하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1709년 110가정이 로테르담까지 도망하였지만, 대서양이 가로놓여 있자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들의 곤경을 불쌍히 여긴 영국의 앤 여왕은 난민들을 구하기 위해 급히 네덜란드 항구로 영국 배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영국이 제공해 준 리머릭 카운티에 정착했고, 영국 정부는 20년 동안 그들이 싼 집세를 내고 농사를 지으면서 새 삶을 살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제 막 도착한 독일 피난민들은 토착 아이리시 농부들보다 농사의 모든 부분에서 우월했습니다. 그러자 토착민들의 분노가 치솟았고 렌트비를 600%나 올렸습니다. 이때 존 웨슬리 목사님(그는 아일랜드를 22번 방문했습니다.)은 그들이 영국의 산업을 위해 일하면서도 매우 열악한 처우를 받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이렇게 일기를 썼습니다. “너무 놀랐다! … 땅 주인들은-인간성이 있든 없든- 자기들도 이 사람들처럼 배고픔으로 고통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웨슬리 목사님은 이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없음을 인지했습니다. 또한 이 사람들이 독일을 떠난 지 50년이 되는 동안 “술 취하고, 남을 저주하고, 욕하며, 종교를 철저히 부정하는 데 익숙해졌다”는 사실도 목도했습니다. 웨슬리는 그들이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목회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웨슬리는 독일어에 능통했습니다. 그가 독일어로 설교하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회심했습니다. 그는 감리회 복음이 사람들을 사로잡아 아주 깊이 변화시키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바바라는 18세가 되던 해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공식적으로 고백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몇 년 후 에메랄드 섬을 방문했을 때, 그들 중 두 명이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결국 바바라에게 시작해서 퍼진 감리회 복음이 신세계 토양에 이식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일랜드의 신사계급은 독일 피난민들이 공동으로 경작했던 목초지를 압류했습니다. 땅을 빼앗기고 터무니없는 세금으로 고통당하던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기로 했습니다. 이 무렵 바바라는 헤쉬트(영국식으로 헥Heck)와 결혼하고, 63일 간 여행을 하면서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1760년 뉴욕에는 14,000명의 시민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네덜란드인 영국인 독일인 스페인인 아프리카인들이었습니다. 뉴욕 시의 영적인 경망스러움이 바바라를 놀라게 했는데, 함께 이민 온 가족들의 영적인 상태도 이와 비슷하였습니다. 바바라는 사촌인 필립 엠버리에게 설교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필립은 교회도 회중도 없는 상황에서는 설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바라는 “당신의 집에서 설교하세요. 그럼 제가 회중을 모을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처음에는 바바라와 남편, 그리고 노동자 한 명과 흑인 여성 시종 등 네 명만 모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꾸준히 참석했습니다. 겨자씨가 싹을 내고 열매를 맺지 않을 것 같았을 때, 캡틴 토머스 웹이 등장했습니다. 토머스는 알바니에 주둔중인 연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웹이 설교하기 시작하면서 회중이 증가했습니다. 곧 집이 비좁을 정도로 회중이 늘어났습니다. 바바라의 기획으로 교회를 세웠고, 이것이 신세계(미국) 최초의 감리회 건물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금방 부흥해 1768년 뉴욕에 또 다른 교회를 건축하였고, 매 주일 수 백 명이 모였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의 기운이 일어나자 바바라와 남편은 다섯 자녀들과 뉴욕의 챔플린 호수 근처 캄덴의 농장으로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혁명을 후원했던 성난 이웃들이 그들의 모든 목축을 죽이고 그들을 추방했습니다.
할 수 없이 1770년 바바라 가족은 다시 캐나다 몬트리올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몇 년이 지난 뒤 브록크빌로 정착했습니다. 뉴욕 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황량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위축되는 법이 없던 바바라는 자신의 겨자씨를 또 다시 뿌렸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캐나다에서 첫 감리교 모임을 형성할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녀의 노력으로 모인 사람들은 5년 동안 함께 사역했고, 그 다음에야 순회설교자가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 왔습니다.
바바라가 70세 되었을 때, 아들이 의자에 앉아서 독일어 성경을 무릎에 펴 놓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습니다. 영어를 잘 하지 못했지만 캐나다의 영국 감리회 어머니로 추앙받은 바바라는 1804년 그런 모습으로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2008년 3월 맨해튼 보로우의 명예시민으로 추서되었습니다.
바바라 헥은 가는 곳마다 복음의 씨를 뿌리고, 교회를 개척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교인들을 돌보고, 그들의 신앙의 형성과 성장을 위해 힘쓴 신앙의 어머니입니다. 바바라의 신앙적 삶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는 뉴욕 존스트릿감리교회의 설교의자 옆 두 개의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두 개의 황동 촛대가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 줍니다. 이것은 바바라가 매주일 예배를 위해 두 촛대를 가져온 것을 기념해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오늘도 예배 때마다 불을 켜고 있습니다. 바바라를 기념하는 램프에는 언제나 한 부셀(bushel) 정도의 기름이 채워져 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평생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교회를 개척한 바바라 헥처럼
우리도 어떻게 복음의 씨앗을 뿌릴지 생각해 봅시다.
2. 우리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7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웨슬리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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