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어그램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 인물 9번 유형 : 아브라함

나효선 2015. 10. 14. 18:00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 인물 9번 유형 : 아브라함

 

1. 길을 떠나는 아브람

 

길을 떠나는 일은 사람들이 흔히 동경하면서도 막상 떠나려면,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일상의 삶을 훌쩍 떠나는 일은 더욱 어렵고, 삶의 익숙한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아프리카 오지의 물 없는 곳에서, 그것도 집이 나무로 된 곳이면 흰개미들이 모조리 갉아 먹는 참말로 살기 어려운 고장도 떠나지 못하고 안주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미지의 세계로 나가는 것은 꿈과 모험을 동시에 요구한다.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그 위에 믿음이 무엇보다도 요청되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첫 번째로 인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가해지는 아브람이 창세기 12:1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하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창세기 12:4)고 성서는 기록하였다.

척박한 땅이라도 살던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어려운 터에, 아브람이 떠난 곳이 어떤 곳인가? 고대 인류 문화 발상지 가운데 하나로, 수메르 문명이 꽃피웠던 곳, 당시 세계에서는 가장 살기 좋은 곳을 떠난 것이 아니었던가!

 

모든 사람에게 상상조차 힘든 일이지만, 성격 유형 가운데 에니어그램 9번 유형은 길을 떠나고 이사하고 움직이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사람들이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관계, 새로운 일 모두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에 쉽지 않다. 새 사람을 만나는 것도 부담스럽다. 일상에서도 남이 찾아와 인사를 청하면, 수인사는 하여도 좀처럼 자기편에서 먼저 다가가는 일은 드물다.

 

에니어그램 9번은 4번 유형이나 5번 유형과 함께 움츠러들고 위축되기 쉬운 사람들이다. 특히 9번 유형은 관성의 법칙에 강하다. 한번 눌러 앉기로 말하면, 계속해서 자리를 고수한다. 웬만하면 이사도 안 가고, 직장을 옮기는 일 같은 것도 잘 안 한다. 그런 만큼 보존하는 데는 강한 사람들이다. 사람을 한번 사귀면 변함이 없다. 평화를 사랑하고 너그럽고 관용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9번 유형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깃든다. 참고 견디는 마음이 크고, 양보도 잘한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잘 끌어안고 품는다. 어떤 것도 수용하는 힘이 크기에 ‘컨테이너 타입’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모든 일이 적극적으로 보면, 평화를 만드는 힘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극적으로는 갈등을 기피하기 위한 몸짓임을 알 수 있다.

 

에니어그램 9번 유형은 갈등을 기피하는 성향 때문에, 우유부단하거나 미루기를 잘하고, 뭔가 결단력을 보이고 선택을 하려면 스트레스가 생긴다. 이것은 격정이 나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저절로 해결되기를 바란다. 기다려도 해결이 안 되면 누군가 자기 대신에 나서서 해결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래도 안 되면 자신이 직접 나서지만, 대개의 경우는 때가 늦은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시간관 자체가 독특하다. 이를테면, 머릿속의 시계가 출발 시계는 없고 도착 시계만 있다. 대개는 도착 시간만 생각하다가 떠나서 막상 도착하고 보면 시간이 늦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으레 30분 늦는 사람으로 호가 나있다.

 

그러나 ‘나는 지각을 모른다.’는 9번 유형들을 때때로 만난다. 매우 부지런한 9번이라 하겠다. 이들은 관성의 또 다른 면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행동의 관성이다. 부지런을 떨면 쉬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의 끝없는 순례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2. 바로 왕을 속이는 아브람

 

아브라함은 세계의 삼대 종교인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 공통적으로 믿음의 조상이다. 그런 만큼 ‘믿음’하면 아브라함이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비록 이름이 바뀌기 전 아브람일 때의 일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프레드릭 빅흐너가 표현하듯이 일종의 팔불출이다. 이렇게 그는 말한다. ‘세상에, 평생을 두고 남에게 국 국물을 쏟으며 사는 사람을 슐리멜이라 하고, 밤낮 국 국물이 쏟히는 사람을 슐레모츨레라 한다면, 아브라함이야말로 슐레모츨레이다.’

 

이런 모습이 제일 먼저 드러난 곳이 이집트였다. 성서의 기록을 보자.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는 아내 사래에게 말하였다. “여보, 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인가를 잘 알고 있소.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서,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는 죽이고 당신을 살릴 것이오.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모두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자기 생존 본능의 표현인 것은 인정한다. 그야말로 인지상정이라 할 것이다. 보존형인 9번 유형에게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부인을 누이라 속이며, 그 때문에 대접도 받고 덕 좀 보겠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아연실색,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도 내친김에 한발 더 나가는 관성을 볼 수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에니어그램 일반을 보면, 속임수는 3번 유형의 격정이다. 그런데 9번 유형인 아브람이 속임수를 쓴다. 9번 유형이 퇴화하면 6번 유형의 격정 속으로 들어가서 공포와 불안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9번 유형이 반격정에 사로잡히면 3번 유형의 격정 속으로 빠지는데, 이는 퇴행보다도 위험한 지경이다. 아브람이 바로 여기에 빠진 것이다.

 

에니어그램 9번 유형은 편안한 사람으로 순종적이며 남들과 잘 지내려는 것이 강하다. 남에게 의존적이어서 남을 이상적으로 보며 남을 통해서 자기 인생을 산다. 상황이 뒤집히는 것과 어떤 종류의 압력이라도 두려워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서 길을 떠나기는 하였으나, 아브람이 죽음을 생각할 만큼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내면의 갈등을 느꼈을 때 흔들렸던 것을 본다.

 

평소에 건강할 때는 그렇게도 침착하고 안정되어 있고 평온하던 9번 유형이 평상심을 잃고 자기 고착에 빠져서 강박충동에 떠밀리기 시작하면 아브람에게서 나타난 것처럼, 초점의 대상이 되는 것이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내켜하지 않으며, 무관심하고 게으르게 머뭇거리기를 잘하며 문제가 제풀에 꺾여 사라질 때까지 발뺌하며 피한다. 현실을 ‘꺼버리기’ 시작하고 자신들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잊어버리게 된다.

 

여기서 더 밀리면 9번 유형은 현실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에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게 된다. 에니어그램 8번 유형, 1번 유형들과 함께 관계와 행동 중심이 강한 9번 유형이 그 행동 중심을 잘못 쓰게 되면 돌출 행동이나 돌출 발언이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 따라서 할 말, 안 할 말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3. 롯에게 양보하는 아브람

 

세상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다. 남에게 뭔가를 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주는 행위의 이면을 놓고 볼 때, 사심 없이 주는 경우가 있고 이와 대조적으로 안 주면 불이익을 당할까봐 주는 경우도 있다. 아브람이 이집트 사람들에게 사래를 내주는 경우가 후자에 속한다면, 롯에게 ‘물이 넉넉한 것이 마치 주님의 동산과도 같고, 이집트 땅과도 같았다’는 요단의 온 들판을 양보한 것이 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평화주의자인 9번 유형은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갈등을 피하기 위하여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평상심을 유지할 때에도, 그래서 남에게 거절을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건강해져서 통합의 방향으로 이행할 때,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행동하게 되면, 적극적으로 사심 없이 주거나 양보한다. 나의 유익보다 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너그러움이 돋보이는 사람이 된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주변국의 여러 왕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쳤을 때, ‘그들은 롯까지 사로잡아 가고, 그의 재산까지 빼앗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브람은 ‘집에서 낳아 훈련시킨 사병 삼백열여덟 명을 데리고’ 쫓아가서 롯을 구하였다. 막강한 연합군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사병을 이끌고 가서 용맹하게 싸울 수 있는 것도 9번 유형이 건강할 때 평화를 만드는 사람답게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남을 돕는 특징이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그들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느끼도록 해주며, 집단을 조화롭게 하며 사람들을 하나로 모은다. 마음이 편안할 때 아브람이 그러하듯이 건강한 9번 유형은 마음이 열려있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평온하다. 수용력이 있고 자신이나 남을 신뢰하고 느긋하고 자신이나 인생에 대하여 편하다. 참을성이 있고 점잖고 허세부리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신에 대하여 소박함이 있고 순전히 좋은 사람들이다.

 

아브람이 이런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살았기에 나이 일흔 다섯에 고향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고, 롯을 구하고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고 백세에 약속된 아들을 받기도 하였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말썽을 잘 일으키지 않고 편안한 9번 유형은 만 여섯 살이 되기까지 양친 부모의 사랑을 고르게 받고 자라서 갈등을 비교적으로 모르고 자란다. 양친 부모와 애정도 적극적으로 경험하며 자라기 때문에 부모 같은 사람이 되고 싶고 부모처럼 살려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평균 상태에만 있어도 고분고분하고 남들과 잘 지내려는 것이 강하다.

 

따라서 그들은 갈등에 민감하고 또 약하기도 하다. 그래서 갈등을 기피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남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대단히 원하기 때문에 결국은 갈등을 해소시키며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원형심리학에서도 말하는 것처럼, 갈등도 위기와 마찬가지로 이겨내고 나면 이전보다 더욱 발전하고 성숙할 만큼 변화된다.

 

아브람이 끝없는 여로를 가며 수많은 갈등을 극복하면서 변화를 거듭한 것이 마침내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는 데까지 이른 것이리라.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셔도 그것을 감당할 만한 마음의 그릇과 응답의 자세를 갖추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4. 소돔을 위해 기도하는 아브라함

 

에니어그램은 우주적 상징이다. 삼의 법칙과 칠의 법칙이 배합되어 온전함을 이루는 것을 나타내준다. 온전한 하나를 나타내는 원 안에 삼각형이 들어있다. 그 정점에 9번이 자리한다. 그리고 밑변 좌우에 6번과 3번이 자리한다. 믿음의 조상들이 여기에 자리한다. 아브라함이 9번 유형으로 정점에 있고, 그 아래 좌우에 이삭이 6번이고 야곱이 3번으로 자리한다. 마치 에니어그램이 믿음의 조상들을 설명하기 위한 것처럼 되어있다.

 

믿음의 조상들을 논외로 하더라도, 9번은 에니어그램의 대표이다. 9번 유형은 다른 모든 유형을 또한 아우른다. 예를 들자면,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어린이 에니어그램을 찾도록 할 때, 9번 유형은 거의 예외 없이 여러 가지 유형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자기 것 같다고 한다. 그것만큼 수용적이며 포괄적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에니어그램의 색채론을 보면, 삼각형 안에 드는 9번, 6번, 3번에게서 삼원색을 확인할 수 있는데 역시 정점에 있는 9번 유형이 빨강, 6번 유형이 노랑, 3번 유형이 파랑이다.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어른이 되어서도 9번 유형의 사람들은 에니어그램을 알든 모르든 빨간 색을 좋아한다. 색깔 가운데 빨강은 모든 색을 포괄하고 수용하는 색깔이다.

 

너그럽게 품어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일찍이 굴지예프는 당대의 최고 지성인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었으면서도 열한 살의 소년 프릿츠 피터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었다. 즉, ‘사람들과 잘 지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중요한 길은 한 가지 뿐이다. 모든 종류의 상황 속에서,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 ; 끊임없이 그들에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더불어 사는 것이다.’

 

이런 지혜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성격 유형이 9번 유형이다. 그들이 최고의 상태에서 드러내는 특징을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최고의 상태에서 드러낸 특징과 동일시될 듯하다. 그들은 아주 건강할 때, 침착해지며 대단한 마음의 평온과 순전한 만족감을 지니고 산다. 자율성과 성취감을 느끼며 산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자신과 일치하면서도 바로 그 자신과의 일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깊은 관계를 만드는 능력은 더 커져야만 한다. 더욱 생기 있고, 의식이 깨어 있고, 자신과 남에게 대하여 더욱 민감해진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믿음이 초연함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초연함이란 안락하고 익숙하고 편안하고 가장 살기 좋은 고향집,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를 떠난 데서 시작하여 끝없는 여로, 끊임없는 모험과 순례의 길을 걸었다. 백세에 약속으로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리는 ‘미완성의 제사’를 드렸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롯에게 비옥한 땅을 양보한 것 뿐 아니라, 그 극치는 타락한 도성 소돔을 위해 기도하는 데서 나타났다. 사람이 제 고장을 위해서도 목숨을 걸고 기도하기가 쉽지 않은 터에, 아브라함은 자기가 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저주받을 만큼 타락한 다른 도성을 위하여 인격과 실존을 걸고 기도한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이루려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출처 : 공동체성서연구원 김영운 목사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 12: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1:1,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린도후서 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