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4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1과 노블리스 오블리제 이회영

나효선 2014. 11. 17. 23:00

기독교대한감리회 2014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1과 노블리스 오블리제

이회영

 

* 성경봉독 : 출애굽기 32:30~35

* 참고성경 : 마태복음 19:16~22

* 요절 :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 32:32)

 

 

서론

이회영(李會榮)은 조선 명문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천하였습니다. 일찍부터 항일의병을 지원하고 신교육을 보급하였고,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나라가 일제에 합병된 이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데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었습니다. 3·1운동 이후에는 ‘흑색공포단’ 등을 통한 격렬한 무력항일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본론

이회영은 1867년 서울 저동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명문 가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 ‘소영’을 제외한 그의 형제 6명 모두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헌신하였기에 ‘6영’으로 부르고 있으며 또 자신들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대표적 가문이 되었습니다.

 

이회영은 가정 분위기나 사회적 환경으로 볼 때 당연히 관계에 투신할 입장이었지만 벼슬길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어려서부터 자유와 평등, 인권 사상을 몸소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하였습니다. 그는 집안의 노비들을 풀어 주기도 했고, 남의 집 노비들에게 존댓말을 썼으며, 적자와 서자의 차별을 폐하고, 부인들의 재가나 재혼을 장려했습니다. 특히 과부로 있던 누이동생을 거짓장사 지낸 후 재가시킨 일화는 아주 유명하며, 자신도 나중에 상처한 후 젊은 과부를 정식부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는 1896년부터 항일의병과 신교육의 보급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경기도 개성 인근 풍덕지방에 인삼밭을 일구었는데 6년 동안을 잘 키워 수확기를 앞둔 1902년 가을 어느 날, 도둑을 맞는 일이 있었습니다. 일본인의 사주를 받은 도둑은 경찰과 한편이 되어 무허가 재배를 구실로 도리어 이회영을 처벌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격분한 그는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창문을 부수며 경찰관을 엄히 꾸짖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나흘간 강제구금 당했습니다. 이후 문중의 항의로 법적투쟁을 한 결과 사실이 밝혀져 이회영은 얼마간의 보상을 받고 곤욕을 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이 고종에게 알려져 크게 칭찬을 받았고 탁지부 주사로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았습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비밀리에 진행될 때, 그는 장유순 이상설 이시영과 을사조약 파기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후 나인영 기산도와 을사 5적 암살을 모의하였으나 이마저도 미수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1906년 초여름, 이상설 장유순 여준 이동녕 등과 의논하여 해외 독립운동기지를 설치하기로 하고 그 첫 단계로 만주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2세 교육에 힘썼습니다.

 

이후 국내 활동을 위해 귀환한 그는 상동교회 권사로 헌신하면서 1907년 ‘상동청년학원’ 학감으로 취임하여 교육운동을 벌였습니다. 마침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와 협의하여 특사를 파견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릴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그는 이 뜻을 잘 알고 지내던 내시 안호형을 통해 고종에게 전달했으며, 고종에게서 백지위임 밀서(대한제국 황제 신임장 및 친서)를 받아 이상설 이준 이위종으로 하여금 만국평화회의에 출석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전 세계에 알리는 헤이그 특사 사건의 중요한 막후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 그는 상동학원을 거점으로 전덕기 양기탁 이동녕 이관직 안창호와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10년 국내항일운동의 한계를 느낀 그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 근거지를 물색하고 돌아왔으며 나라가 일본에 합병되자 망명을 결심하였습니다. 서둘러 재산을 처분한 후인 그해 12월 그의 6형제 가족들 40여 명을 이끌고 만주 요령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로 망명하였습니다. 이듬해 4월 항일독립단체이자 교포들의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그 부속기관으로 빈 창고를 이용해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형 이석영의 사재를 털어 100여 리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에 부지를 매입하고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여 본격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이후 그는 국내 정세를 살피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하였습니다.

 

3·1운동 직전에는 이승훈 오세창과 고종의 중국망명계획을 세워 고종도 이를 승낙하였으나 갑작스런 별세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에 일단 가담했으나, 방법론적 견해 차이로 결별하고, 이후 무정부주의와 그 행동노선을 추구하였습니다. 1923년 무정부주의운동의 일환으로 중국 호남성 한수현에 한중합작 ‘이상농촌 양도촌’ 건설에 힘썼고,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으며, 1928년에는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 운동”이라는 제하의 글을 보내어 이 논문의 취지가 동 대회 결의안으로 채택되게 하였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과 일본의 독립지사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그해 10월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비밀행동조직인 ‘흑색공포단’ 등을 통한 격렬한 무력항일투쟁도 벌여나갔습니다. 1932년에는 침체된 무장독립투쟁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만주에 항일의용군의 결성과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비밀리에 수립한 후 대련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상해 밀정에게 정보가 누설되어 대련에 도착하자마자 일경과 중국수상서원에게 검거되어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그후 1972년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1985년 ‘육영회’란 이름으로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고, ‘우당기념관’도 운영되고 있습니다.

 

 

결론

이회영은 조선의 명문대가 출신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인 권세가의 길을 걷지 않고 당시 사회의 봉건적 인습을 타파하는 개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변화된 데에는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를 만나 감화 받고 기독교인이 된 것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 나라의 주권을 빼앗겨 고통당하는 민족을 위해 일하라는 부름에 응답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한일합방 후에는 중국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운영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선구자적인 일이었습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그 후 독립투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으며, 광복군 태동의 기초가 되기도 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과 포기하는 것이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지 알아봅시다.

 

2.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4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Ⅱ

 

참고 : 조선 선조 때의 문신 백사 이항복(李恒福)의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