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4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2과 사랑의 인술 김병서

나효선 2014. 12. 22. 01:30

기독교대한감리회 2014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2과 사랑의 인술

김병서

 

* 성경봉독 : 누가복음 10:25~37

* 참고성경 : 고린도후서 9:6~12

* 요절 :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눅 10:36~37)

 

 

서론

올해의 마지막 달에 살펴볼 인물은 김병서(金秉瑞)입니다. 그는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신학문을 공부한 인물입니다. 그는 의료 선교사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접하는 공부를 하였고 세브란스전문학교에 진학하여 훈련을 받은 후 의사가 되었습니다. 의사가 된 후에는 해주의 구세병원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구세병원에 홀 선교사가 원장으로 부임한 후에는 홀과 함께 근무하면서 구세요양원을 설립하여 결핵환자를 돌보는 일에 나섰습니다. 동시에 결핵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크리스마스 실 발행도 구상하여 이것이 제도적으로 정착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의료 활동을 통해 나라와 민족을 섬겼습니다.

 

 

본론

김병서는 1893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의사로 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고자 유신학교에 유학하게 했으며, 미감리회 의료선교사 노튼의 조수가 되어 예수 믿고 의학과 영어 독일어를 배우게 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선각자였습니다.

 

1913년 해주에 노튼기념병원과 남본정감리교회를 세운 노튼은 김병서를 불러 약국 일을 맡기는 한편 의학을 가르쳤고 1917년에는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하도록 하였으며, 그는 재학 중 의사면허시험에 합격하여 세브란스의전을 채 마치지 않고 수료하였습니다.

 

한편 3·1운동을 앞두고 남본정감리교회에서 열린 모임에서 박희도 오세창 김병서 정재용이 황해도 대표로 선임되어 상경하였는데, 마침 이날 사정이 있어 함께 가지 못한 그는 구세병원(노튼기념병원을 개칭) 직원들과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였습니다. 그때 일경이 돌에 걸려 넘어지며 자기 칼에 찔려 죽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일제는 이를 김병서가 찔러 죽였다고 체포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그는 1 년간의 옥고를 치렀고 의사면허까지 취소당하였습니다. 1920년 말 출감한 그는 조선약학교를 졸업(1921~23)하고 약제사가 되어 구세병원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이 무렵 그는 남본정감리교회의 전도사(장로)로 활동하였으며 황해도 평신도 대표로 선임되었습니다.

 

1926년 셔우드 홀이 내한하여 구세병원 원장으로 취임한 후 김병서는 동갑내기인 홀과 친하게 지내며 적극적으로 병원 운영에 관여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사업으로 결핵요양소를 설립하는 데 합의하고 1928년 한국 최초의 결핵요양원인 구세요양원과 결핵위생학교를 설립해 결핵퇴치를 위한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해주도립병원 의료외과장 김형익의 권유로 1930년 한지의사(限地醫師)시험에 합격하여 면허를 취득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더 좋은 결핵요양소를 만들기 위해 1년 동안 일본요양소를 시찰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인공기흉법’과 ‘자외선치료법’을 배워 와 한국에 최초로 도입하였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실을 가지고 와서 홀에게 “일본사람들이 이것을 하니 우리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그의 제안을 홀이 받아들인 후 준비 과정을 거쳐 1932년 12월 3일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해 결핵퇴치운동의 새 기원을 마련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 실에 처음에는 거북선을 도안하였지만 일본 관리의 반대로 서울의 남대문을 도안하여 발행하였습니다.

 

한편 이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실을 발행한 지 얼마 안 되어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고 주재소에 갔습니다. 주재소 주임이 마치 큰 죄인을 다루듯이, “이게 뭐요, 우표요” 하였습니다. “그건 크리스마스 실 아닙니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주임이 다시 “문제는 우매한 민중에게 우표 대신 이걸 붙이게 한 거요. 이건 순전히 고의적인 일이오. 우체국에서 물심양면으로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알겠소? 독립이니 뭐니 날뛰는 자보다 당신이 더 악질이오.”하고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그래, 어쩌자는 거요”하고 대답하자 주임은 “당장 집어치우시오. 말 안 들으면 집어 넣겠소.” 위협하였습니다. 그는 크리스마스 실의 역사와 폐병퇴치 자금이 긴요하다는 긴 설명을 한 끝에야 풀려났습니다. 이후에도 몇 번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또 그는 안창호 선생이 폐결핵에 걸려 요양할 때 치료하여 준 것이 빌미가 되어 황해도 흥사단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체포되어 고통을 당했습니다. 무혐의로 석방되었습니다만 요양원에서는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황해도 연백군 용도면 천태리에 가서 황해의원을 개업하는 동시에 백천복음농민학교를 설립하여 형편상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하는 농촌청소년들에게 학문과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한편 일제말기 강제징용과 징병이 실시되면서 조만식 선생이 지원병 격려 연설을 강요받아 난처해졌을 때, 김병서가 폐결핵 진단서를 첨부하여 연설에 나가지 않도록 조치, 어려운 고비를 넘기도록 도움을 준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배려로 해방 후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양건국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김병서가 15인 위원회 무임소위원으로 피택, 의료계 대표로 선임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신세를 진 공산당원 임홍수가 밤중에 찾아와 그가 17번째 숙청대상이니 피신하라고 일러주어 38선을 넘어 월남하였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대구로 피난하여 황해의원을 개업하고 주로 피난민을 치료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대구피난민회장으로 일하면서 삼덕동(동인동) 동인교회와 유치원을 설립하였습니다.

 

1959년 66세의 김병서는 여생을 편히 쉬시라는 자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기도 양평 서종면 문호리에 월급 5천 원을 받는 공의 자리를 자원하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을 받지 않았고, 좀 형편이 나은 사람에게는 수가의 절반 정도를 받았습니다. 자신은 5천 원의 수입이 있으니 족하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활동은 의술에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문호리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곳은 숯을 구워 팔면서 생활하는 벽지마을이었고, 특히 겨울에는 노름과 술로 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는 산을 사서 주민들에게 품삯을 주고 개간토록 하였으며, 그 땅에 딸기를 심어 수익금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한 폐쇄되었던 장로교회(문호교회)를 다시 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의술과 농촌운동, 교회재건을 통해 마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마을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평생 사랑의 인술을 펼친 그는 1976년 6월 25일(83세)에 하나님 나라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결론

김병서는 해주의 구세병원을 통해 사랑의 인술을 나누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특히 당시에는 외면당했던 결핵환자를 위해 구세요양원을 설립하고 그들을 입원시켜 보다 좋은 환경 속에서 치료받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결핵퇴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하는 일을 홀 선교사와 함께 창안하여 1932년부터 실시하였습니다.

그 후 안창호 선생의 치료를 빌미로 민족운동에 연관되었다고 체포되어 고통을 당하고, 구세요양원에서도 추방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벽지에 가서 진료를 하면서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학문과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사랑을 베풀며 헌신하라는 주님의 부름에 그대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사랑을 나누고 이웃을 섬기는 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교회와 선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4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Ⅱ

 

집필자 : 조이제 목사(중부연회 김포지방 샘솟는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