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4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0과 한글 사랑과 나라 사랑
김윤경
* 성경봉독 : 데살로니가전서 1:2~10
* 참고성경 : 요한복음 15:1~7
* 요절 :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전 1:3)
서론
10월에 살펴볼 인물은 김윤경(金允經)입니다. 김윤경은 교회가 설립한 선교학교에서 신학문과 신앙을 배우면서 신앙인으로 변화된 인물입니다. 특히 한글학자 주시경의 한글학과 민족의식에 크게 감동받아 평생을 다른 길을 엿보지 않고 한길, 즉 한글연구와 한글교육, 한글보급운동에만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장하고 활동한 시기가 일제가 지배하여 우리말과 글을 빼앗으려 한 시기였기에 그의 우리글 사랑과 열정은 독립운동에도 참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라의 말과 글을 살리는 것이 민족의 얼을 살리는 것이고 그러한 활동은 곧바로 독립운동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론
김윤경은 1894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906년 12세가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집안 모두가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1908년에는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상경하여 우산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이듬해 정동제일교회 최병헌 목사가 설립한 ‘서강의법학교’에서 이 학교를 인수하였기에 그는 의법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1909년 최병헌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그의 신앙적인 감화와 영향력에 힘입어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11년에는 상동교회에서 운영하는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하여 주시경 선생에게서 한글학을 배웠습니다. 주시경 선생은 그에게 “우리글이 우리의 오직 하나되는 보배임을 깨닫게 하였고, 나의 일생을 좌우할 감격을 받게” 하였으며, 그가 일생을 바쳐 한글연구와 한글교육, 한글보급운동에 앞장서도록 작용했습니다. 주시경 선생은 그에게 국어학 지식만이 아니라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의식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그였기에 그는 상동청년학원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한글연구에 평생을 바쳤을 뿐 아니라 일제 말기를 훼절 없이 통과할 수 있었던 흔치 않은 지식인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1913년 상동청년학원을 졸업한 그는 이후 4년 여 동안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 교사로 있으면서 국어문법, 대수, 서양사 등을 가르쳤으며, “조선어 연구의 기초”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1917년 창신학교를 사임한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재학 당시 그는 3·1운동에 참가하였고, 1921년 12월에는 주시경 선생의 문하생이었던 최두선 임경재 권덕규 장지영과 함께 한국 최초의 민간 학술단체인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여 우리말 글 연구와 정리 보급에 앞장섰으며, 졸업하던 1922년에는 흥사단의 전신인 수양동맹회의 창립회원으로도 참여했습니다.
1922년 4월 배화학당의 교사로 부임, 배화학당 고등과에서 가르치다가 후에는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무주임과 훈육주임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의 공부와 생활을 지도했으며 한글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남다른 헌신과 능력을 눈여겨본 부이 교장은 그에게 특별상금을 내렸으며, 이에 힘입어 1926년 일본에 건너가 닛쿄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조선문자의 역사적 고찰”이라는 졸업논문을 쓰고 1929년 귀국했습니다.
그해 4월 다시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조선어와 역사를 가르치다가,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정든 교단을 떠났습니다. 이후 1 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 한편 1938년 1월, 옥중에 있을 때 유명한 「조선문자 급 어학사」를 발간하였습니다. 이 책은 제목에서 보듯이 국어문자사와 국어학사를 다룬 것입니다. 우선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문자에 대해서 서술하고, 훈민정음의 창제와 변천, 훈민정음에 대한 여러 학설을 역사적으로 정리했으며, 개화기 이후에 나온 국어문법서들을 자세히 검토하고 있습니다. 자료와 학설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1942년 성신가정여학교 교사가 되어 교육 활동에 나섰지만, 그해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다시 중단되었습니다. 1년 이상 갖은 고문과 형벌을 받으며 옥고를 치르다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어머니의 별세 소식도 모른 채 감옥 생활을 해야 했던 아픔을 겪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조선어학회 상무이사로, 국어부흥강습회 강사로 활약하였고 연희전문학교 접수위원이 되었습니다. 이어 연희전문학교 이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봉직한 그는 연희대학교 문과대학장을 거쳐 1947년 총장 대리로 피택되었습니다. 1948년에는 주시경 선생의 문법체계를 이어받은 「나라말본」과 「중등말본」을 편찬하여 국어연구에 이바지하였고, 한글전용 가로쓰기 국어순화 등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의 글을 모아 7권으로 펴나온 「김윤경전집」은 한글연구의 여러 업적과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한 많은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1952년 문교부 사상지도원 전문위원, 국사편찬위원, 대학교육 심의위원, 교수요목개정심의회 국어위원 등에 선임되었으며, 이듬해 연희대학교 대학원장, 그리고 국어심의회위원에 선임되었습니다. 1954년 도서편찬심의위원에 위촉되었고, 1955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또한 그해 학술회 회원이 되었고,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기독교교육공로상 수상과 함께 문교부에서 국어공로상을 받았습니다. 1960년 학술원종신회원이 되었으며, 1962년 교육임시특례법에 따라 연세대학교에서 정년퇴직하였습니다. 그해 학술원에서 학술문화공로상을 수상했고, 1963년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상하였습니다. 이 해부터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로 국어학을 강의하다가 1969년 2월 3일 별세하였습니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한글연구와 교육사업을 통해 나라 사랑의 길을 실천했고, 주시경 선생의 인격과 학문에 깊은 감화를 받아 외솔 최현배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민족정신 선각의 길을 걸었습니다. 또한 교회의 장로로 시무하면서 기독교적 양심에 입각한 신앙의 생애를 살았습니다.
결론
김윤경은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으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방향을 전환했기에 그의 뒤를 이어 한글에 온 삶을 바쳤습니다. 그는 한글만을 사랑하였으며 한글을 갈고 닦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1921년에는 주시경 선생의 뜻을 잇기 위해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여 우리말 글 연구와 정리 보급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면서 일제 치하의 우리 젊은이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통한 민족정신을 불어넣었습니다.
한편 「조선문자 급 어학사」, 「나라말본」이란 책도 저술하여 우리 역사 이래 이어온 선각의 학문을 분석 체계화할 뿐 아니라 훈민정음의 창제와 변천 과정을 역사적으로 정리하여 국어연구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한글 사랑을 통해 나라 사랑을 실천한 모범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2. 기독교에서 한글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봅시다.
그리고 한글성경 번역의 역사도 알아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4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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