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4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8과 일장기 제거의 주인공 이길용

나효선 2014. 8. 15. 14:50

기독교대한감리회 2014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8과 일장기 제거의 주인공

이길용

 

 

* 성경봉독 : 빌립보서 3:12~14

* 참고성경 : 고린도전서 9:24~27

* 요절 :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서론

8월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길용(李吉用)은 신문사에서 체육 기자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특히 그는 식민지 한국에서 스포츠를 통해 한국의 민족의식이 살아 있음을 대내외에 과시하였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는 또 ‘조선체육회’를 창립하면서 그 실무 작업을 담당하여 초창기 활동의 기반을 닦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각종 체육단체의 임원으로 식민지 한국 체육의 발전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운동기자단’을 조직하여 운동경기 보도의 전문화를 꾀하였고, 한국 체육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바탕도 마련하였습니다.

 

 

본론

이길용은 1899년 경기도 인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인천 동구 창영동에 거주했기에 일찍부터 감리교 신앙을 수용하는 계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존스 선교사가 설립한 감리교 선교학교인 인천 영화학교를 거쳐 감리교 개척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하였습니다. 그후 일본 교토의 도지샤대학에 진학하였지만 집안 사정으로 중도 포기하고 1918년 귀국하였습니다.

 

1919년 서울 용산철도강습소에 취직하여 대전역 역무원으로 근무하였습니다. 당시 3·1운동의 열기가 전국을 휩쓸자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직장을 활용하여 기미독립선언서와 상해 임시정부의 기밀서류를 철도를 통해 운송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전제일감리교회에 출석하여 청년들을 지도하면서 대전 지역 3·1운동과 야학운동의 중심역할을 하였습니다. 1920년에는 3·1운동 1주년을 맞아 그 정신을 되새기고 자유 독립을 쟁취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 발표된 ‘대한독립 1주년 기념 축하경고문’의 대전 지역 배포하는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년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룬 뒤 1921년 6월 출소하였습니다.

 

출옥 후에도 그는 대전에 1923년 6월까지 머물며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옥고를 치르다 인연을 맺은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의 끈질긴 권고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대전제일교회에 출석하며 서기훈 이명제 전도사와 대전 지역 3·1운동의 흐름에 동참하면서 대전 지역의 상황과 국내 정보를 상해 임시정부에 전파하는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후 인천으로 거주지를 옮겨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인천에 거주하는 배재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으로 조직된 ‘인배회’ 등 여러 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와서 배재학당 재학 때부터 출석했던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하며 엡웟청년회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한동안 조선일보사로 이적하였다가 송진우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1927년부터 다시 동아일보사 기자로 활동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체육 관련 기자로 활동하며 식민지 조선에서 스포츠의 의미를 강조하였습니다. 1923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전담하였습니다. 1924년 11월에는 윤치호 신흥우와 함께 ‘조선체육회’를 창립해 초창기의 기반을 닦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이후에도 각종 체육단체 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27년에는 조선운동기자단을 조직하여 운동경기의 전문화에 기여하였습니다.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보이스카우트 단체인 ‘조선소년군총본부’의 이사를 맡아 청소년 계몽운동에 나섰고, 1929년에 조선정구협회 이사로도 활동하였고, 1934년에는 여성체육장려회의 이사와 서울육상경기연맹 창립총무, 아이스하키협회 이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체육 활동을 보도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민족정신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렸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운동선수의 모습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는 1932년 8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출전한 김은배·권태하 선수가 골인하는 사진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버렸습니다. 1936년 8월에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동아일보에 “명예의 우리 손군 세계제패의 개가”라는 제목으로 이를 보도하면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없애버렸습니다. 계속해서 신동아에 실린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도 일장기를 지워버려 민족정신을 일깨웠습니다. 연이어 발생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이 일을 주도한 이길용은 동료들과 종로경찰서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은 뒤 40일 구류처분을 받았고 이후 동아일보 기자 활동은 물론 그가 심혈을 기울여 왔던 체육계 활동도 금지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후에도 그는 일제에 대한 저항을 그치지 않아 감옥 생활을 해야했습니다.

 

다시 동아일보사에 복직하여 사업부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또 조선체육회를 재건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고 상무이사로도 활동하였습니다. 정부수립 후에는 서울특별시 고문, 이화여대 이사, 한국민주당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30년에는 동아일보에 「조선야구사」를, 1932년에는 신동아에 「여자정구 10년사」를 연재하기도 하였는데 이것들은 그가 남긴 유명한 업적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인정되어 1949년 10월 ‘대한체육회 공로상’을 수상했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내가 죄 지은 것이 없는데 왜 도망을 가는가” 라며 당당히 서울에 남아 「대한체육사」 집필에 전념하다가 7월 17일 서울 성북동 집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된 뒤 소식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1989년 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 그의 정신과 삶을 기념해 ‘이길용 체육상’을 제정하여 매년 사상하고 있으며,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결론

이길용은 감리교 신앙을 수용하고 감리교 선교학교를 통해 성장한 인물입니다. 그는 감리교 학교와 감리교회를 기반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대전에 거주할 때는 대전제일교회를 통해 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인천에 거주할 때는 배재학당과 관련된 인배회 활동을 통해 지역운동을 이끌었고, 서울에 거주하면서는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하며 당시의 인사들과 교류하며 언론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자신의 직업을 잘 활용하였습니다. 대전철도 역무원으로 근무할 때는 경부선 철도를 상해임시정부와 연결되는 데 이용하였고,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할 때는 체육 관련 보도를 통해 조선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자의 전문화되고 생생한 필치를 이용하여 각종 경기들이 발전하는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또 그가 취재 현장에서 경험한 실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 체육의 역사도 정리하여 한국 체육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자신이 일하는 직장을 활용하여 신앙을 증거할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2. 축구나 농구, 야구 등의 체육 활동을 통한 선교방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4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