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4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6과 여성독립운동가
박현숙
* 성경봉독 : 마가복음 4:1-9
* 참고성경 : 갈라디아서 6:6-10
* 요절 :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막 4:8)
서론
6월의 인물은 박현숙(朴賢淑)입니다. 그녀는 숭의여학교에 입학하여 황애덕 선생(2월 인물)을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인물입니다. 그녀는 이때부터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학생시절부터 1919년 3·1운동 때까지는 비밀결사단체인 송죽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해방까지는 감리교 여선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북한의 재건 사업에 힘을 보탰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월남하여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교회 장로로 역할하며 교회를 발전시키는 일과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본론
박현숙은 1896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에게 이끌려 5세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정진소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후 숭의여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곳에서 그녀는 ‘송죽회’에 가입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송죽회는 1913년 숭의여학교 교사 황애덕이 주도하여 조직한 한국 최초의 여성 비밀결사단체입니다. 송죽회 회원들은 ‘생일잔치’로 위장하고 매달 15일을 기해 모임을 갖고 회비를 모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서 엿장수, 떡장수로 변장하고 거리에서 행상을 하였고, 자수 혹은 머리채를 잘라 팔기도 하였습니다.
1915년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박현숙은 전주의 기전여학교 교사로 부임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을 따르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공주회’를 조직하고, 학생들의 신앙생활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습니다. 1917년 4월 숭의여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는 회장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으로 송죽회를 이끌며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이후 송죽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여성운동 세력은 평양 만세운동의 중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3·1운동 민족대표인 평양 남산현교회의 신홍식 목사에게 평양만세운동에 참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 송죽회 회원들은 태극기 제작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3월 1일 남산현교회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시내로 진출하여 장로교인들과 합류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습니다. 박현숙은 “신대한의 애국 청년 끓는 피가 뜨거워”로 시작하는 ‘혈성가’를 부르며 여성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혈성가’를 대담하게 불러 독립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그녀는 1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8월 하순 병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출옥 후 독립운동가 김성업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려나가는 한편 평양 숭혜(崇慧)여학교 교감으로 취임하여 교육에 종사하였습니다. 감리교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에도 계속 투신하였습니다. 평양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평양감리교 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다가 1920년 10월 다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집행유예로 출옥하였습니다.
출옥 후에는 평양 YWCA에 참여하여 문맹퇴치, 농촌사업 등을 통한 부녀운동을 벌여나갔습니다. 미감리회 여선교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1928년에는 서기, 1929년에는 부회장, 1930년에는 회장으로 선임되어 감리교 여성을 이끌었습니다. 남북의 두 감리교회가 합동한 후에는 평양지방 총무로 활동하면서 전국연합회 부회장까지 맡았습니다.
일제 말기인 1941년 2월에 개최한 만국부인기도회가 문제가 되어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만국부인기도회는 지금도 매해 드리는 ‘세계여성기도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세계의 기독교 여성들이 매년 2월 말에서 3월 초 하루를 잡아 공동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교사들이 주관하여 1930년대부터 실시하였습니다. 일제는 당시 사용한 기도문 중 하나님 나라, 평화 등과 같은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이를 사건화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기도회 순서지를 각 지역에 발송하는 책임을 맡았던 박현숙은 또 다시 체포되어 한 달 가량 구금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일제의 기독교 통제가 더욱 악랄해져 기독교인들이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남편 김성업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1937년에 검거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여름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습니다.
해방 후 그녀는 조만식을 위시한 애국동지들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946년 신탁통치안이 가결되자 조만식 이윤영 김병연 등과 소련군 사령관 스치코프를 방문하여 신탁통치반대를 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자 월남하여 서울에 ‘송죽원’이란 고아원을 설립하였고, 1953년에는 숭의여학교를 서울에서 재건하고 이사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치인으로서의 길도 걸었습니다. 이승만과 ‘민족통일본부’ 여자부장, 입법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52년 10월에는 무임소장관(정무제2장관)으로 입각하여 20개월 동안 활동하였습니다. 1958년에는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김화), 1963년에는 공화당 소속의 국회의원(전국구)으로 당선되었습니다. 1965년에는 국회에서 조찬기도회를 개최하여 국가조찬기도회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외에 전국 여성단체최고위원, 3·1여성동지회 회장, 서울적십자사 자문위원장, 대한부인회 부총재 등의 직책을 맡았습니다.
한편 1946년 10월부터는 월남한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남산교회에 출석하여 1980년 마지막 날에 별세하기까지 장로의 직임을 다하였고,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두 기에 걸쳐 여선교회 전국연합회 회장으로 헌신하였습니다. 남산교회의 반포동 예배당을 건축할 때 건축위원회 명예회장으로 역할하며 물심양면으로 교회에 기여하였고, 강원도 철원의 신흥교회(1967년)와 서울 도봉구의 창현교회(갈릴리교회, 1968년)를 개척하고 박현숙 장로 기념 예배당을 봉헌하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결론
박현숙은 선교 초기에 기독교가 전파된 평양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앙 안에서 성장하고 신앙으로 살아간 인물입니다. 어린 여학생 신분에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일경에 체포되어서도 독립의 기개를 꺾지 않았습니다. 또 여성들을 깨우치기 위한 농촌사업과 문맹퇴치운동에 적극 나섰고, 감리교 여선교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교회여성운동을 지도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정치에 뛰어들어 나라를 세우는 데 앞장섰습니다. 평양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신탁통치반대운동에 나섰습니다. 그다음 월남하여서는 교육사업과 사회복지사업을 하면서 장관, 국회의원 등의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모든 활동은 교회를 통해 그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응답의 표시였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자신의 삶을 크게 변화시킨 경험을 이야기해 봅시다.
2. 교회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과 자신의 사회생활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4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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