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4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7과 한국 오페라의 선구자
김자경
* 성경봉독 : 마태복음 5:13~16
* 참고성경 : 이사야 60:1~3
* 요절 :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서론
김자경(金慈璟)은 한국 오페라의 선구자입니다. 그녀는 교회와 선교 학교를 통해 음악을 접하였고,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드러냈습니다. 처음에는 피아노를 전공하였으나 성악에 더 재능이 있다는 학교의 제안에 따라 전공을 바꾸었습니다.
그녀는 1941년 첫 독창회를 갖는 것으로 성악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후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에서 주인공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오페라 인생을 살아갑니다. 1968년에는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단하여 한국 오페라가 뿌리 내리고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본론
김자경은 1917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이화보통학교를 거쳐 루씨보통학교와 루씨여고를 졸업했습니다. 음악에 재능이 있는 김자경은 여덟 살 때 선교사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서양 음악을 하려면 우리 음악도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야금 장고 소리 민요 등도 배웠습니다. 그녀는 이화여전에 입학하여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성악에도 재능을 보였습니다. 학교에서도 성악공부를 하면 더 좋을 것 같으니 졸업을 1년 연장해서 성악공부를 하면 성악과 피아노 두 과의 졸업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에 장학금을 받고 성악과로 전과하여 채선엽 교수에게 레슨을 받았고 1940년 이화여전을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미국 유학의 꿈을 접고 이화여고 교사가 되었고, 1945년부터는 이화여전에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본격적인 음악 활동은 1941년 제1회 독창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48년에는 명동 시공관에서 공연한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에서 주인공 비올레타로 열연하였습니다. ‘춘희’는 오페라 인생의 막을 열어 주었습니다. 훗날 자서전을 통해 “춘희가 이어준 인연으로, 오페라에 살고 오페라에 죽는 인생을 살았고 ‘오씨 성에 이름은 페라’인 오서방과 결혼했다.”며 오페라와 춘희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를 ‘영원한 춘희’라고 부릅니다.
1948년 8월에는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 유학하였고, 1950년 5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뉴욕 카네기 홀에서 독창회를 가져 그의 재능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습니다(1987년 일흔 살의 나이로 37년 만에 다시 카네기 홀에 서는 영광을 얻기도 했습니다). 1958년에 귀국하여 1983년까지 이화여대 성악과 교수로 봉직하며 음악인 양성에 힘을 다했습니다. 1965년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음악학교 성악과 수료, 1994년 한양대학교대학원 국악과 수학 등으로 배움의 과정도 그치지 않고 계속하였습니다.
196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오페라단인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단하고 첫 작품으로 ‘춘희’를 공연하여 한국 오페라 발전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그녀는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작품을 만들어 오페라 인구의 저변 확대를 꾀하였으며 신인 발굴 및 정기 공연과 지방 및 소극장 공연도 계속하여 한국에서 오페라가 뿌리를 내리고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991년에는 사재 17억 원을 투여하여 김자경오페라단을 사단법인으로 바꾸었고, 신촌의 자택을 개조해 ‘김자경오페라연구원’을 열었습니다.
한편 1990년에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 새 삶을 사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 해는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별세한 지 28년 되던 해였습니다. 당시 그녀는 혼자라는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새벽이면 일어나 동쪽 창을 향해 울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여 나를 이제는 데려가 주소서. 더는 힘이 없습니다. 의욕이 없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 동쪽 하늘의 태양이 가슴에 내리비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마음속에서 어떤 외침이 들렸다고 합니다. “자경아, 너는 28년 전에 남편과 죽었고 새로운 네가 그해에 다시 태어난 것이다. 네 나이 이제 스물여덟 살인데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그 순간 그녀는 가슴 벅찬 희열을 느꼈습니다. 그날 밤 텔레비전에 출연할 일이 있었는데, 사회자가 첫 물음으로 그녀의 나이가 얼마인지를 묻자, “올해 나이 스물여덟”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김자경은 스물여덟의 젊음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매년 ‘한강사랑음악회’를 개최하고 한국의 가곡과 민요,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정상급 성악가들을 통해 대중에게 선사했습니다. 그리고 19번의 독창회에서 나온 수익금을 불우아동복지기금과 기독교 100주년 선교자금, 홍난파 선생 흉상 건립기금, 호스피스 건립기금, 맹인개안수술비 등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비롯해, 대한민국 은관 문화훈장, 중앙일보 문화대상, 국민훈장석류장, 올해의 음악가상, 세종문화상, 프랑스 문화예술 훈장 등의 상을 받았고,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가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도 나이를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1998년 8월 그녀가 매년 개최하는 ‘한강사랑음악회’에 등장하여 ‘별’을 노래하던 중 호흡이 가빠 노래를 중단하고 힘없이 무대를 내려왔습니다. 그 후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그녀는 1999년 숙원 사업으로 생각하던 ‘김자경 예술학교’ 설립을 뒤로 남긴 채 인생의 무대 뒤로 퇴장하고 말았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한 그녀의 아버지 김영환 목사와 날마다 그녀를 붙들고 “우리 자경이를 통해 주님의 빛이 세상에 비치게 해 주소서.” 기도했던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신앙은 평생 그를 붙들어 주는 힘이었습니다. 신촌의 대신교회에 출석하며 권사로서의 직임을 다하였고 성가대를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결론
김자경은 한국 오페라를 개척하였고 그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한국 음악 및 오페라에서 별 중의 별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1948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연된 오페라 ‘춘희’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이후 별세할 때까지 수많은 오페라에 출연하면서 오페라와 결혼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1968년에는 한국 최초의 민간 오페라단을 창단하였습니다. 이 일은 오페라 인구의 저변을 확대하는 일이었으며 신인 발굴의 기회도 되어 한국에서 오페라가 뿌리를 내리고 발전을 하는 결정적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평생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이 물려준 신앙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신앙으로 어려움을 극복했으며, 오페라를 사랑하고 오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영원한 춘희’라 불렀는데, 그것은 그녀가 개척하고 닦은 기반 위에서 오늘의 한국 음악과 오페라가 발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2. 자신이 가진 재능을 교회와 사회에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4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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