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1과 한글점자 창안자
박두성
● 성경봉독 : 마가복음 8:22~26
● 참고성경 : 요엘 2:28~32
● 요절 :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막 8:25)
서론
박두성(朴斗星)은 시각 장애인 교육에 헌신한 인물입니다. 그는 시각 장애인를 위한 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인 시각 장애인 교육에 나섰습니다. 그는 시각 장애인들의 생활도 배움을 통해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그는 시각 장애인의 교육을 원활히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일본어로 된 점자밖에 없었기에 우리말을 사용하는 한국인에게는 그것이 여간 불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비밀리에 한글 점자 연구에 착수했고, 7년 동안 노력한 끝에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고 불리는 한글 점자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시각 장애인의 세종대왕으로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계속하여〈조선어독본〉을 한글 점자로 간행하여 시각 장애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한몫을 담당했습니다. 장애인 교육에 거의 관심이 없던 일제 시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평생을 시각 장애인 교육에 전념했으며, 한국 특수교육 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습니다.
본론
박두성은 1888년 경기도 강화군 교동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8세가 되던 1895년 7월 무관 출신 이동휘(李東輝)가 강화도에 세운 보창학교에 입학하여 4년 동안 신학문을 수학하였습니다. 그 후 이동휘의 주선으로 한성사범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06년에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어의동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 교사로 발탁되어 8 년간 근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13년 제생원 맹아부(濟生院盲啞部, 서울맹아학교 전신)가 설립되면서 교사로 부임하여 맹인교육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남이 하지 않은 시각 장애인 교육에 첫발을 들여놓게 된 박두성은 먼저 암흑뿐인 시각 장애인 교육의 애로점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당시 청각 교육, 주입식 교육에 한정된 시각 장애인 교육의 현실을 깨달은 그는 교육의 기본 자료인 점자 교과서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1913년 8월 14일 일본에서 점자인쇄기를 들여와 비록 일본어이기는 하나 한국 최초로 점자 교과서를 출판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일제가 조선어 과목을 없애려 할 때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강력히 항의하여 제생원에서만은 조선어 과목을 유지시킬 수 있었습니다.
“눈이 없다고 사람을 통째로 버릴 수 있겠어요? 앞 못 보는 사람에게 모국어를 안 가르치면 이중의 불구가 되어 생활을 못하는 것이외다. 눈 밝은 사람들은 자기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읽고 쓸 수 있지만 실명한 이들에게 조선말까지 빼앗는다면 눈 먼 데다 벙어리까지 되란 말인가요?”
한편 박두성은 한글 점자가 없어 한국인 시각 장애인에 대한 교육이 원활히 이루이지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글 점자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제자인 이종덕 전태환을 비롯하여 8명을 규합하여 ‘조선어 점자연구위원회’(육화사 六花社)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끊임없는 연구 결과 드디어 1926년 11월 4일 이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는 이를 ‘훈맹정음’이라 명명하여 세상에 발표하면서 전국 시각 장애인들에게 비록 눈은 못 봐도 배워야 하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자고 외쳤습니다. 점자통신도 시작하였으며, 한글 점자의 창안과 보급을 통해 우리나라 시각장애인들의 문맹퇴치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후 박두성은 점자성경 출판에 관심과 노력을 쏟기 시작하였습니다. 1931년 한글 마태복음 원판 출간에 착수하여 그해 9월에 완간하였고, 1941년에는 신약성서 점자원판을 완성하였습니다. 1935년에는 부면협의원(府面協議員) 선거에서 한글 점자투표(點字投票)를 인정받았으며, 1936년 12월에는 점자 찬송가를 완성했습니다.
한편 1935년 제생원 교사를 정년퇴임하고 1936년 감리교 학교인 인천 영화학교(永化學校) 교장으로 부임하여 1939년까지 봉직했습니다. 해방 후 1947년 잠시 인천 율목동 동장을 역임하였으나 이내 맹인선교에 뜻을 두어 사임하였습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점자투표권을 재승인 받았으며, 그해 점자신약성서 출판이 이루어졌습니다. 점자로 성경을 출판하기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로 밤에 아연판과 흰 종이에 점을 찍는 일을 했는데, 10여 년 동안 새벽 4~5시까지 무리하게 하여 시력이 약화되기까지 했습니다.
이후 6·25전쟁으로 신약의 점자 아연판이 소실되자 또 다시 제작에 몰두하여, 1957년에는 성경전서의 점역(點譯)을 완성하였습니다. 때로는 재정곤란을 겪어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점자서적 출판에 진력하였습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성경을 비롯하여 ‘3·1운동사’, ‘ 국사’, ‘ 순애보’, ‘ 사랑’, ‘ 금삼의 피’, ‘ 임꺽정’, ‘ 천기대요’, ‘ 천자문’, ‘ 명심보감’, ‘위인전’, ‘ 범일지’, ‘ 이솝우화’, ‘ 속담집’, ‘ 홍경래전’, ‘ 여명’, ‘ 침구요혈’등 76종의 맹인용 교육 자료를 점역·출간할 수 있었습니다.
박두성은 서울 정동제일교회와 인천 내리교회(內里敎會)에 교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한국맹인사업협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맹인선교에도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지병에 시달리던 마지막 순간까지 “점자책 쌓지 말고 꽂아…”라고 맹인교육을 강조하다가 1963년 8월 25일 7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국가와 사회단체로부터 많은 감사와 표창을 받았습니다. 1928년 12월 1일 경성부 교육회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1934년 7월 29일 일본 맹인교육회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1962년 8월 15일 정부로부터 문화 포장을 받았습니다. 2002년 4월 문화관광부는 그를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 기념행사와 강연회를 열었습니다.
결론
박두성은 시각 장애인이 미래를 볼 수 있는 일에 몸과 마음을 바쳤습니다. 그는 시각 장애인 교육이 단순한 자선사업이 되어서는 안 되며, 직업교육과 병행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교육은 사회 여러 분야를 이끌어나갈 시각 장애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시각 장애인을 위해 한글 점자를 창안하였고 이를 보급하였습니다. 성경을 비롯한 시각 장애인용 교육자료 도서를 점역·출간하였으며, 이를 보급하여 전국의 시각장애인들이 한글 점자를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우리나라 시각 장애인의 문맹률이 크게 줄어들었고, 시각 장애인 인재들이 여러 분야에서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장애인들이 바로 서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장애인이 우리 교회에서 예배하고 생활하는 데 불편한 점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3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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