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2과 순교자 최인규

나효선 2013. 12. 18. 00:23

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2과 순교자

최인규

 

● 성경봉독 : 사도행전 4:13~21

● 참고성경 : 이사야 6:9~13

● 요절 :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행 4:19~20)

 

서론

 

일제는 말기에 대륙 침략을 감행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사상 통일을 이루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교회에도 ‘국가의식’이란 미명하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예배 시간에 동방요배(東方遙拜)를 하게 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교회는 이에 굴복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를 우상숭배로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몇몇 신앙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감옥에 갇혔고, 그중 일부는 순교했습니다.

그 순교자 중 한 사람이 최인규(崔仁圭)입니다. 최인규는 뒤늦게 신앙을 갖게 되었지만, 믿은 이후에는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굳건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신앙 양심상 신사참배를 국가 의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 속에서도 뜻을 꺾지 않았기에 순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론

 

최인규는 강원도 삼척군에서 1881년에 태어났습니다. 양반 가문이었기에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수학하였습니다. 18세에 부모의 주선으로 결혼하고 7년 만인 1905년 첫 딸을 낳았으나 그 후 자녀를 얻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다 사랑하는 부인이 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자 가정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45세 되던 1924년 여름, 그는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북평교회(현재의 북평제일감리교회) 담임인 김기정 목사에게 성경과 신앙생활에 대한 지도를 받았습니다. 1925년 2월 15일 학습을 받았고 그해 12월 7일 세례를 받고 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일을 엄격히 성수하였고 매일 아침 혼자 앉아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기를 기뻐하였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의 중요한 일꾼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속장, 유사(재정부장), 주일학교 교장 등의 직임도 맡았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한 지 8년 만인 1932년 9월 16일에는 삼척구역회에서 권사직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권사는 본처사역자로서 감리사의 파송을 받아 교회를 맡아 관리 운영할 뿐 아니라 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직책이었습니다.

마침 새로 설립된 천곡교회가 그를 설교자로 요청했습니다. 최인규는 이를 쾌히 승낙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자신의 논 539평과 밭 1,369평을 교회부지로 헌납하였고, 밤에는 새끼를 꼬고 낮에는 재목을 운반하며 열심으로 건축에 몰두하였습니다. 그 결과 1932년 여덟 칸 초가 예배당을 세우고 이듬해 봉헌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최인규의 헌신적인 신앙과 생활은 전국의 감리교회에 소개되었고, 1938년 10월 총회 때에는 상장과 은제 상패를 표창하여 교인들이 모범으로 삼게 했습니다.

한편 일제는 1938년 이후 전국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교회는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 단순한 국가의식이라며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최인규는 신사참배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고민하던 그는 결국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1940년 5월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삼척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으며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못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된 의무로서 국가적인 의식을 존중해 달라는 것뿐”이라는 회유와 함께 잔혹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유와 협박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나로서는 당신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다. 신사(神社)는 일본민족의 종교다. 신사참배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 앞에 굴복하는 것이지 그것이 단순한 국가행사일 수 없다.”

 

이에 일경은 망신을 주기 위해 그의 어깨에 똥통을 지우고 동네 집집마다 끌고 다니며 “내가 예수 믿는 최인규입니다”하고 외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한다는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기쁘게 끌려 다녔습니다.

당시 울진교회를 맡아 전도사 일을 하던 친구 차국성 권사가 삼척경찰서장과 안면이 있어 “최인규는 원래 정신병자였는데 예수를 믿고 차도가 좋았다. 지금 아마 그것이 재발된 것 같으니 가급적 석방시켜 주길 바란다”고 간청했습니다. 이에 경찰서장은 “당신이 정신병자야. 예수를 믿으려면 최인규처럼 믿어” 하고 호통을 쳐서 보냈다고 합니다. 가혹한 고문을 가하던 일경도 그의 신앙에 내심 감복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강릉구치소로 옮겨서도 믿음을 굽히지 않았고, 함흥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으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요, 다른 신은 경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천조대신과 천황도 하나님이 내신 사람이다. … 그러므로 신사참배는 절대로 할 수 없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기독교를 없애려고 애쓰던 옛날의 바빌론과 로마는 망하였다. 너희 일본도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지 않으면, … 반드시 멸망하고 말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재판장은 책상을 치며 격노했습니다. 그리고 불경죄로 징역 2년형을 언도했습니다. 그때가 1941년 11월 21일이었습니다. 감옥에서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늘 찬송을 부르며 전도하였습니다. 그는 조용히 머리 숙인 채 묵상에 잠겨 허리를 구부리고 있다가도 간수가 궁성요배를 시키면 허리를 쭉 폈습니다. 그러면 간수는 욕을 하며 두들겨 팼고, 그는 “신사참배를 안 하기 위해 감옥에 왔는데 왜 때리느냐. 나는 재판장 앞에서도 안 하겠다고 선언한 사람”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함께 갇혀 있던 원산지방 고성교회의 이진구 목사는 그가 매 맞는 것이 안쓰러워 “신사참배를 한다 하면 내보내줄 것 같으니 그냥 한다고 하고 나가세요”라고 권하였다가 크게 책망을 들었다 합니다.

이후 1941년 12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습니다. 여기서도 회유를 당했지만 그는 꺾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고문과 잦은 단식으로 그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고, 음식조차 먹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결국 1942년 12월 16일 오후 2시 그는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유해는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삼척교회로 옮겨졌고, 거기서 다시 1986년 11월 11일 그가 헌신했던 천곡교회로 옮겨졌습니다.

 

 

결론

 

최인규는 옥중에서 죽임을 당한 순교자입니다. 그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규정하여 이를 거부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이는 개인적으로도 자신에게 주어진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잘 감당했다는 영광스러운 일일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끊어질 만한 역사의 맥도 잇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을 부정하고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했다는 민족사적 의미도 지닙니다.

최인규는 협박과 폭력으로 육신이 무너지는 고통을 당하였지만 정신적으로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영혼은 더욱 맑게 살아나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빛이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지탱해 주는 기반이 되었고, 우리와 후손들에게 반드시 넘겨주어야 할 중요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순교자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순교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이야기해봅시다.

 

2. 오늘의 교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무엇일까요?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3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

 

집필자 : 조이제 목사 (중부연회 김포지방 샘솟는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