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대구중앙교회 피난살이 시절 추억

나효선 2013. 11. 16. 23:50

기독교대한감리회 대구중앙교회 피난살이 시절 추억

 

미국에서 다니러 온 큰언니가 피난시절에 살았던 대구에 가고 싶다고 해서

대구에서 태어난 작은 오빠와 함께 기차로 추억 여행을 갔습니다.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대구 원대동의 대구중앙감리교회 마당에 판잣집들을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대구중앙감리교회

  

 

 

대구중앙감리교회에 이원영 목사님이 계셔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 한국전쟁 발발 후 대구에 피난 온 감리교인들이 네 곳에 모여 기도처를 마련하고 예배하였다.

이 기도처를 이름하여 ‘제4교회’ 라고 하였다.

1952년 1월 27일 ‘제4교회’를 ‘달성교회’ 라 칭하고 기도처를 구역회로 분할하기로 가결하였다. ≫

  

 

 

 

대구달성교회 창립기념 사진 1952년 6월 27일

   

 

 

집에 돌아와 찍은 사진을 정리하다가 위 사진에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올라선 여자아이 아래에 군복을 입고 아기를 안고 있는 분입니다.

그 아기는 지금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목회하고 있는 큰오빠입니다.

 

최초의 군목 라사행 목사님

 

≪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최전방에서 파편으로 총상을 입은 한 병사가 이승만 당시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목숨이 위태롭던 그 병사는 “유엔군 산하 각 부서에는 성직자가 파송돼 활동하고 있다”며 “우리 군에도 목사님과 신부님을 보내주셔서 장병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달라”고 호소했다. “죽어가는 장병들에게 세례와 영세를 베풀고, 임종예배와 종부성사를 드려 천국 가는 성사를 해 달라”고도 했다.

이에 이 대통령은 기독교와 천주교, 불교 등 3개 종단 지도자들을 경무대로 초청, 군에 성직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기독교와 천주교는 즉각 승락했으나, 살상을 금하는 불교는 이를 사양했다. 대통령은 지체 없이 대통령령 제36호 ‘군목 파송명령’을 내렸고, 목사 44명과 신부 16명은 계급도 월급도 없이 전방으로 나아갔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나의 아버지는 최초의 군목 44명 중의 한 분이셨습니다.

 

 

도로 쪽을 바라보고 찍은 큰언니와 판잣집

  

 

여기서 서울에서 목회하고 있는 작은 오빠가 태어났습니다.

 

작은 언니

1950년 부산으로 가는 피난열차 지붕위에서 타고 내려오다가

대전역에서 4살이던 작은 언니가 아래로 떨어졌는데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사진은 1953년이나 1954년쯤 좋은 점수의 시험지인 듯~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현재 감나무가 있는 쪽으로 판잣집들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고 합니다.

  

 

서울피란 대구대서초등학교(서울삼영대구분교) 제3회 졸업기념 사진

단기 4287-2333 = 1954년 3월 4일

  

 

달성공원 안에 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1954년 달성예배당 주일학교 졸업식

큰언니의 신명여중 1학년 입학 때의 사진입니다.

  

 

 

이원영 목사님이 선물도 주시고 달성공원까지 데려다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재의 달성공원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요한2서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