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0과 한국의 슈바이처 문창모

나효선 2013. 10. 26. 19:55

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0과 한국의 슈바이처

문창모

 

● 성경봉독 : 시편 23:1~6

● 참고성경 : 빌립보서 3:12~14

● 요절 :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서론

 

문창모(文昌模)는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된 이후 평생을 진료와 지역 사회 활동에 헌신한 인물입니다. 하루도 병원 문을 닫은 적이 없이 성실하게 환자를 진료하였습니다. 가난한 환자에게는 진료비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차비를 보태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의사가 자신의 천직이며, 그 천직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또 두드러진 사회사업가이기도 했습니다. 지역 사회의 가난한 이웃, 불우한 형제들을 말로만 사랑하지 않고 몸소 실천한 인물입니다. 그것도 성경의 가르침대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였습니다.

 

 

본론

 

문창모는 평북 선천에서 1907년에 태어났습니다. 수원 농림학교(현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농사개량에 힘쓰던 아버지의 덕분에 그는 삼봉학교, 영성학교, 오산학교를 거쳐 배재고보에서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기독교와의 만남은 영성학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학교는 매일 아침 30분씩 예배드린 뒤 공부를 시작했으며, 성경을 정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장 이인창 장로가 신앙생활을 권유하여 남창교회 주일학교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배재고보에서는 전도 활동과 봉사 활동에 나섰고 기독학생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한편 순종의 인산일 며칠 뒤인 1926년 6월 15일 정오에 종로에서 서울지역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계획하였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 온갖 학대와 박해를 받으면서 굴욕적으로 사느니 차라리 총독부로 진격해 각각 일본 고관 한 명씩을 부둥켜안고 같이 죽자고 결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감옥 생활을 하였습니다.

1927년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의학을 공부하는 동안 “의술은 인술로서 정성된 마음이 깃든 신앙으로 치료된다”는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1931년에 졸업하고 의사의 길을 걸었는데, 의사가 된 것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확신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여 주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때부터 4 년간 반장 노릇을 하며 졸업 후 의사면허를 받아들고 그것은 역시 조선총독부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 믿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을 뭐든지 했습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늦은 시간까지 하루에 16시간을 일했습니다. 의사답게 살고자 노력에 노력을 했습니다.”

 

세브란스 재학 때부터 방학 때면 해주 구세병원에서 실습하면서 홀박사(Sherwood Hall M. D.)와 인연을 맺었고, 1932년부터 1년 동안 해주 구세병원에서 근무하였습니다. 그 후 평양의 기홀병원에서 3 년간 근무하였으며, 1935년 황해도 웅진 용호도에 공의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곳은 텃세가 심했지만 헌신적으로 의료봉사를 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손수 예배당을 짓는 모습을 보고 그를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1937년 해주에서 첫 개인병원 ‘안이비인후과 전문 평화의원’을 열었습니다. 하루에 200명이 넘는 환자가 찾아올 정도로 이름난 병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영만 목사가 찾아와 구세병원이 문을 닫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명령이니 가서 맡으라고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고민하던 그는 부친과 장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인병원을 판 후 1940년 홀 박사의 뒤를 이어 해주 구세병원 의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러나 6개월 후 일제의 명령으로 문을 닫게 되자 다시 개인병원을 열었습니다.

해방 후 해주 건국준비위원회장 겸 해주시장이 되어 1개월가량 일했는데, 그의 지시를 받은 부하가 공산당원 6명을 죽인 일로 인해 서울로 내려왔습니다. 이후 인천도립병원장, 마산국립결핵요양소장, 세브란스병원장으로 취임하여 일하는 한편,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는 등 결핵 퇴치를 위해서 활동했습니다.

1958년 새로 설립되는 원주연합기독병원 초대 원장으로 선임되면서 원주에 정착하여 병원건축과 개원을 떠맡았습니다. 1964년 2월에는 학성동에 진료실과 자택을 겸한 ‘문이비인후과’를 개원하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의사 가운을 벗기까지 43년 동안 진료와 의료봉사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시간에 쫓기는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 진료를 받도록 그리고 시골에서 온 사람들이 진료를 받고 돌아갈 수 있도록 아침 6시부터 병원 문을 열었고, 한 번도 병원 문을 닫는 날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환자에게는 진료비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차비를 보태주기도 하였습니다. 고령에 국회의원이 되어 의정활동으로 바빴지만 서울과 원주를 오가며 환자들을 진료하였습니다. 2000년 의약분업으로 병·의원이 폐업하는 사태가 일어났을 때도, “환자를 떠난 의사는 더 이상 의사가 아니다”라며 매일 아침 7시면 어김없이 진료를 했습니다. 2001년 3월 31일 폐업예배를 드리면서 그는 “하나님이 나를 의사로 만들어 준 이후 눈감는 순간까지 진료를 멈추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손놀림이 둔해져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70년 의료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한때 그는 정치가의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4대(1958)와 6대(1963)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낙선된 후 정치의 꿈을 접었습니다. 그러나 1985년 연세대 100주년 기념식에서 정주영 회장과 함께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며 가까워진 인연으로 1992년 통일국민당의 전국구 1번 후보로 지명되어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86세 최고령 국회의원으로서 공직자윤리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의원 시절 내내 새벽 4시에 일어나 병원과 국회를 오가며 일했습니다.

한편 1938년 31세에 동대문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된 그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사무국 위원장(1945)과 유지재단 이사(1952) 등을 역임하였고, 원주YMCA 초대회장(1972)·대한의학협회 총회회장(1976)·인천기독병원 이사장(1979)·여주 여광육아원 이사장(1996)·원주 학림원 이사장(1996)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국민훈장 모란장과 대한민국 건국포장, 대한결핵협회 대상, 세계평화복지인물대상, 적십자사 광무장 등을 수상했으며, 2000년에는 인간상록수에 추대되었습니다.

 

 

결론

 

문창모는 의료 활동으로 하나님께 봉사하였습니다. 의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믿고 환자를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기 위해 의사를 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는 방법으로 의사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는 또 장로로서의 길을 걸었습니다. 31세에 서울 동대문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되었고, 원주에 정착한 후에는 원주제일교회 장로로 시무하였습니다. 기도와 봉사로 교회의 일에 앞장섰고, “나는 예수 믿어서 복을 받고 행복하다”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모범을 보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평생 동안 흔들림 없이

    감당하게 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모범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3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