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9과 절제운동의 주역
손메례
●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6:12~20
● 참고성경 : 요한복음 6:32~40
● 요절 :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
서론
한국 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교인들의 술, 담배, 도박, 축첩 등을 금지시켰습니다. 이것들이 사람들의 생활과 정신을 마비시켜 건강하고 건전한 생활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운동의 본격적인 전개는 3·1운동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한국 교회는 전면에 나서 퇴폐 향락 문화를 막는 일에 나섰습니다. 교회가 절제운동을 신앙운동일뿐 아니라 민족운동으로도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절제운동은 선교사가 개별적으로 시작한 운동이지만 1920년대 한국인, 특히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절제운동 조직을 만들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절제운동의 한가운데 서있던 인물은 바로 손메례(孫袂禮)입니다. 손메례는 새 시대 여성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 길은 세속적인 퇴폐 향락 문화에 물든 육체와 영혼을 살리는 것이었고, 죽어가는 한국을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본론
손메례는 1885년 서울 계동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양반집 외동딸로 귀하게 자라던 그녀는 17세 되던 해 손봉순(孫奉順)과 결혼하면서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손봉순이 상동교회의 독실한 교인이었기에 그녀도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1906년 4월 스크랜턴(W. B. Scranton)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얻은 이름이 메례(Mary)입니다. 이후 서양식으로 본명 이정규(李貞圭) 대신 손메례로 부릅니다. 그리고는 상동교회 교인 여메례(余袂禮)가 설립한 진명(進明)여학교에 입학하였고, 진명여학교를 마치고는 상동교회에서 시작한 감리교여학당(Bible Woman’s Training School)에 입학하였습니다. 감리교여학당 졸업 후에는 상동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교회 청년회 일을 맡아보면서 남대문 밖의 서울 근교에까지 나가 전도하였습니다.
손메례는 1923년 절제운동에 적극 나섬으로써 삶의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절제운동은 선교 초기부터 여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했지만 그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일제가 3·1운동 이후 한국의 민족 문화와 정신을 파괴하기 위해 일본식 퇴폐 문화를 한국에 들여왔고, 술 담배 아편 공창을 통해 젊은 세대가 향락문화에 오염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의 확산을 막기 위해 교회가 전면에 나섰습니다. 교회는 금주, 금연, 공창 폐지 같은 정신 운동을 벌였는데 이를 통틀어 절제운동이라 부릅니다. 이 운동은 단순한 신앙운동이 아니고 한국을 살리기 위한 민족운동의 성격도 지녔습니다.
이 운동을 위해 1923년 9월 18일 여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여자절제회’가 설립되었고, 1924년 8월 28일에는 한국인 중심의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이화학당에서 창립하였습니다. 손메례는 이 두 조직에 모두 참여하여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며 이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녀는 일 년 내내 거의 모든 시간을 전국을 순회하며 절제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강연회를 갖는 것으로 보냈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사람들을 계몽하고 민족의 정신을 흐리게 하는 일제의 정신적 문화적 침략에 저항해 나갔습니다.
“술은 탄환 업는 대포와 갓흔데 도로혀 용기를 준다구 밋게 하였다. 여러 해 동안 연구한 결과 지금은 그 비밀을 알엇다. 그러니 우리는 금주하고 금주운동을 철저히 하야 조선을 살니자. 조선의 금주운동은 모든 운동 중에 가장 큰 운동이다. 육을 살니고 령을 살니는 운동이며 죽어가는 조선을 살니는 운동이다”
이처럼 민족운동의 성격을 지닌 절제운동이었기에 그녀의 강연회에는 일본인 경찰들이 들어와 강연 내용을 점검하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강연회에 참석했던 경찰이 감명을 받아 금주 단연을 결심하고 이를 선언한 예도 있었습니다. 신천읍에서 강연회를 열었을 때는 교회 앞에서 술장사를 하며 전도를 방해하던 술집 주인이 금주를 결심하고 술집 처분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절제운동은 손메례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많은 결실을 맺었고, 한국 교회가 일제시대에 한 활동 중에서 내세울 수 있는 업적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위험, 물의 위험, 더위의 위험, 폭탄의 위험 등 모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유일하신 희망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 어려운 위험을 넘어 섰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희망인 동시에 우리 2천만 조선민족 전체의 유일 절대의 희망”이시기 때문입니다.
손메례는 절제회 운동과 함께 여성민족운동 단체인 ‘근우회’에도 참여하였습니다. 1927년 2월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념으로 신간회가 조직되자 이에 대한 자매기구로 여성계에서 조직한 민족운동단체가 ‘근우회’(勤友會)입니다. 그러나 근우회는 1929년 일제에 의해 조직이 와해되고 지도자들이 체포되면서 1930년에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손메례는 1929년 절제회 총무직을 이효덕(李孝德)에게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손메례가 활동을 중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이후 교육 활동에 나섰습니다. 여성을 위한 실습교육기관인 대성학원, 흥아가정여학원 원장으로 1940년대에 활약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경성여자고등기술학교를 설립했고, 1949년에는 서울 궁정동에 정명(貞明)여자중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때 재학생은 350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학교를 운영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1952년 학교 재산과 학생을 이화학교 재단인 유하(有廈)학원에 기증 및 인계하였습니다. 유하학원은 궁정동에 있는 130평 건물과 541평 토지를 기부 받아 그것을 기초로 예술교육 전문학교인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손메례는 학교의 명예교장이 되었고 이화학원 명예이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상동교회 장로였으나 건강이 나빠져서 자택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궁정동교회에 출석하며 말년을 보내다가 1963년 10월 5일 7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결론
손메례는 집안에 갇혀 있던 평범한 양반집 외동딸로 지내다가 집밖으로 나와 교회와 나라를 위해 활동한 인물입니다. 이 일들은 기독교인이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우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후 교회의 전도활동에 헌신하였고, 절제운동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사업으로 자리 잡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교육가로 변신하여 미래를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는 데 헌신하였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활동할 수 있었던 힘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음주, 흡연 등을 즐기는 것이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요?
2. 기독교인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3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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