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8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나효선 2013. 8. 7. 12:00

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8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 성경봉독 : 출애굽기 3:1~12

● 참고성경 : 사무엘상 16:1~13

● 요절 :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서론

 

8월은 광복절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란 역사적 사건이 있어, 나라의 독립과 새로운 나라 건설에 헌신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 뜻을 이어받기로 결심하는 달입니다. 이 번 달에는 이러한 일에 크게 공헌한 인물 중 한 사람인 이승만(李承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승만은 한국 근현대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배재학당의 시기를 거치면서 큰 전환을 겪습니다. 출세를 위해 노력하던 사람에서 교회와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아펜젤러와 서재필을 통해 새로운 사상에 눈을 떴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정치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한국 사회의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삶에 있어 가장 큰 변화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극한적인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감옥에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헌신적인 도움을 주었던 선교사와 교인들의 사랑이 기독교 정신의 발로임을 깨닫게 되면서 기독교 진리에 대한 확신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갖고 나라를 위해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본론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하여 이름을 승룡(承龍)이라 지었지만, 1887년 과거에 낙방한 후 ‘승만’이라 하였다 합니다.

그는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였습니다. 영어를 배워 출세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배재학당에서 영어 이외의 것, 특히 선교사들의 종교인 기독교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영어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정치적 평등과 자유라는 개념들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또 서재필이 조직하고 지도한 협성회와 독립협회에 적극 참여하면서 민주주의 사상에도 눈을 떴습니다. 만민공동회를 주도하면서 진보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었고, 이로 인해 1899년 1월 9일에 터진 ‘박영효 대통령 추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힙니다.

이승만은 투옥 20일 만에 탈옥을 시도하였지만 곧바로 체포되어 재수감되었습니다. 탈옥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목에 칼을 쓰고 손과 발이 묶인 채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배재학당 시절 들었던 설교가 생각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고 했던 선교사의 말이 기억났습니다. 그는 기도하였고 몰래 들여온 성경을 열심히 읽다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직접 기록하였습니다.

 

“혈육의 연한 몸이 오륙년 역고에 큰 질병 없이 무고히 지내며 내외국 사랑하는 교중 형제자매들의 도우심으로 하도 보호를 많이 받았거니와 성신이 나와 함께 계신 줄로 믿고 마음이 점점 굳건하여 영혼의 길을 확실히 찾았으며”

 

개종한 이승만은 깨달은 진리를 동료 죄수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전도하기 위해 ‘옥중 학교’와 ‘옥중 도서관’을 설립하였습니다. 옥중 학교에서는 초등 과정의 일반 교과목뿐 아니라 성경과 찬송가 및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옥중 도서관에는 선교사들의 지원을 받아 영어와 한문, 한글로 인쇄된 도서와 신문, 잡지 등을 비치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개화 지식인들이 집단으로 기독교에 들어오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고, 그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곧 국민계몽서인 <독립정신>의 원고를 완성하였고, 1904년 8월에 석방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석방된 그는 당시 민족운동의 요람지인 상동교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동합니다. 전덕기 목사가 이끄는 상동청년회가 나라와 교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904년 10월 설립한 상동청년학원에 참여하여 초대교장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상동청년학원의 설립 목적을 “하나님 공경하는 참 도로서 근본을 삼아 청년으로 말하여도 벼슬이나 월급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세상에 참 유익한 일꾼이 되기를 작정하자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해 11월 미국으로 가 학업에 몰두하여 1910년 7월 프린스턴대학 대학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라는 논문으로 정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곧이어 귀국하여 YMCA에서 한국의 청년조직과 교육을 겸하는 학생부 간사로 일하면서 YMCA청년학관의 교장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윤치호 등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투옥되자 1912년 3월 미감리회 총회에 참석한다는 구실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이후 이승만은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우선 105인 사건의 실체를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였고, 1913년부터 하와이에서 박용만과 함께 <한국태평양>을 창간하여 한국이 독립하려면 미국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교포사회에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습니다. 1917년 호놀룰루에 기독학원을 설립하였고 이듬해 7월에는 한인기독교회도 설립하였으며, 그해 12월에는 재미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 후에는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와 초대 대통령으로, 서울에서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에서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에 추대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귀국하여 좌익 진영과 투쟁하는 우익진영의 최고지도자로 활약하였습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으로 서울 동대문구에서 당선되었고, 이어서 5월 31일 개원한 제헌국회의 의장에 선임되었습니다. 그는 개회 발언을 통해 국회가 조직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을 하였고,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를 하게 하여 대한민국 국회가 기도로 시작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 제정 반포된 대통령중심제 헌법에 따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 해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였습니다. 이후 1960년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일어난 4·19 의거로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하기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습니다.

 

 

결론

 

이승만은 한국 교회가 배출한 뛰어난 평신도 지도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통해 새로운 사상과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를 기반으로 교회와 나라를 위한 일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활동 초기에는 독립협회와 교회를 중심으로 한 계몽 활동 및 교육 활동으로 인재 양성에 앞장섰고, 미국에 거주하면서는 외교 관계를 통해 나라의 독립을 이루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대통령의 직임을 수행하며 대한민국을 기독교적 기반 위에 세우는 일에 매진하였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일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과는 어떤

    관련이 있으며,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2. 교회와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였지만 그에

    상당하는 대우를 받고 못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찾

    아보고 돌보는 일에 앞장섭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3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