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7과 민족과 고아의 어머니 어윤희

나효선 2013. 7. 25. 01:00

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7과 민족과 고아의 어머니

어윤희

 

● 성경봉독 : 마태복음 25:34~40

● 참고성경 : 요한계시록 2:8~11

● 요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서론

 

어윤희(魚允姬)는 기독교인이 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인물입니다. 그는 신앙을 갖기 전에는 과부, 고아로서 고통을 겪으면서 떠돌아야 했던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녀는 많은 유능한 인재들을 키워낼 수 있었고, 또 많은 사람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하나님을 위한 삶은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식민지 한국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이 감당해야 할 주님의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이 일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수행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의지할 데 없는 버려진 고아들을 친어머니처럼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을 1939년부터 별세할 때까지 30여 년 동안 감당하였습니다.

 

  

본론

 

어윤희는 충북 충주의 산골에서 1878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이 선비 가문이었기에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언충신 행독경’(言忠信行篤敬, 말은 충성되고 미쁘게 하며 행실은 착실하고 남을 공경하라)이란 글귀를 강조하였기에 이 가르침을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16세에는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결혼한 지 2개월 만에 동학군이 되어 집을 나갔고, 곧이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청상과부가 되어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와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지만 몇 년 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 황해도 평산과 해주 등지를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그 후 어윤희는 경기도 개성에 정착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나이 30세가 되던 해 우연히 개성북부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가 정춘수(鄭春洙)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하였고 얼마 후 갬블(F. K. Gamble)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갬블의 추천으로 주로 과부나 기생, 기혼 여성들이 다니던 미리흠(美理欽)여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교육을 받았습니다.

 

졸업 후인 1915년부터 어윤희는 전도부인이 되어 교회 봉사와 전도 사업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녀는 개성과 토산(兎山) 지역에 파송되어 주로 농어촌, 산간벽지교회들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벌였습니다. 1919년에는 개성에 있는 여자성경학원 사감으로 봉직하던 중 3·1운동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교인들을 인솔하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개성만세시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 일이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주님의 뜻인지를 알기 위해 밤을 새워 기도하였습니다. 기도 중에 확신을 얻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 일로 1년 6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녀는 감옥 안에서도 계속적으로 투쟁하여 일본인 간수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을 전향시켰고, 전도하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출옥한 후에도 나라의 독립에 대한 헌신을 계속하여 자신의 집을 독립 운동가들의 은신처나 연락처로 사용하게 했습니다. 이 일로 여러 차례 곤욕을 치렀지만 두려움 없이 계속하였습니다.(이러한 업적이 인정되어 1995년에 독립유공자로 추대되었습니다)

 

1937년에 어윤희는 개성 유지의 도움을 얻어 고려정에 ‘유린보육원’이란 고아원을 설립하고 30여 명의 영아를 보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남은 생을 버려진 고아들의 어머니이자 할머니로 살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해방 후인 1949년에는 월남하여 서울 마포의 서강에 유린보육원을 재건하여 죽는 날까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녀 자신도 어린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식처럼 돌보았습니다. 또 그녀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직접 예배를 인도하면서 아이들을 신앙으로 양육하였습니다.

유린보육원은 서강교회와 관련을 맺으면서 운영되었고, 그 자신도 서강교회에 출석하며 1952년 장로로 피택되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헌신적으로 외로운 어린 아이들을 돌보다가 1961년 11월 18일 84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별세 후 생전에 측근들에게 일러둔 말씀을 지켜 장속을 열어보니 교회 헌금과 자신의 장례비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지막 떠나는 자리까지도 스스로 깨끗하게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감옥 생활을 할 때 만나 남매의 의를 맺은 의료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는 이러한 그녀를 생각하며 그녀의 영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바쳤습니다.

 

“젊었을 때는 여사가 가졌던 모든 것을 나라와 독립을 위하여 바쳤으며 노후에는 여사가 가졌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서 죽도록 충성을 하였습니다. 어 여사의 중요한 사업과 크나큰 관심은 오로지 고아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 자연적으로 아이들은 여사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고 존경하였던 것입니다. 어 여사와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들은 곧 이분이 한 성녀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몸이 몹시 약해 보이고 작은 체구에 그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자아 희생의 정신을 간직하였습니다.”

 

어윤희는 1953년 5월 사회사업가로 나이팅게일 기장을 받았고, 1959년에는 인권옹호 공로표창을 받았으며, 1961년에는 중앙여자고등학교로부터 ‘3·1운동 선도자 찬하’를 받았습니다. 별세한 다음 해인 1962년 3월 1일, 그의 삶을 기념하기 위해 유린보육원에서 성장한 이들과 개성 친지들이 힘을 모아 <장로 어윤희 여사 기념비>를 서강교회 앞마당에 세웠습니다.

 

  

결론

 

어윤희는 남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30세까지는 참 기구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30세 때 하나님을 만남으로 그의 삶은 새로워졌습니다. 이후 그녀의 독실한 믿음과 고결한 인격을 지니게 되었고, 자신을 버리고 남을 자신의 몸 같이 사랑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큰 사람으로 역할 하였고, 약하면서도 강한 이로, 무력 앞에서도 굽히지 않은 이로 살아갔습니다.

어윤희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뜨거운 열정을 갖고 감당하였습니다. 때로는 전도부인으로, 때로는 보육원 원장이었지만 그 직위 자체가 그녀에게 큰 의미를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정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자신이 겪은 고난과 고통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이야기해 봅시다.

 

2.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

   교회와 우리 선교회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3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