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6과 YMCA운동의 주역 신흥우

나효선 2013. 6. 29. 20:45

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6과 YMCA운동의 주역

신흥우

 

● 성경봉독 : 마태복음 20:25~28

● 참고성경 : 디모데전서 4:6~16

● 요 절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 20:26)

 

 

서론

 

신흥우(申興雨)는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평신도 중의 한 사람입니다. 선교사들은 그를 자신들이 내세울 만한 업적으로 생각했고, 신흥우도 자신을 한국 기독교가 자랑할 만한 사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만큼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잘 감당했습니다.

신흥우는 어린 시절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아펜젤러와 서재필에게 기독교와 민주주의 사상을 배웠으며 이를 평생 실천하였습니다. 또 개화 독립운동으로 체포되었을 때에는 이승만 등의 동료들과 감옥 안에서 학교를 열어 양반 지식인들이 집단으로 기독교에 들어오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미국에 유학하고 귀국하여서는 배재학당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 되어 교육 사업에 매진하면서 학교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후 서울 YMCA의 총무가 되어 YMCA의 이념과 조직, 활동을 총지휘하였으며, 농촌사업을 이끌며 당시 황폐화된 농촌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하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흥업구락부를 조직하여 기독교의 사회화, 실제화에 앞장섰습니다.

 

 

본론

 

신흥우는 충북 청원에서 1883년에 태어났습니다. 한학자인 부친에게서 한학을 수학한 뒤, 1894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아펜젤러 서재필 윤치호에게서 민주주의사상을 받아들였습니다. 배재학당에 입학할 때 아버지가 거기서 가르치는 것은 다 배워도 기독교는 관계하지 말라는 명령대로 그는 기독교를 멀리했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과 편견이 조금씩 해소되었고 결국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비록 기독교에 대해 미리 경계심을 갖고 있었지만, 나는 점차 위대한 사상들을 조금씩 알아나갔습니다. ‘먹물주위에 있는 사람은 젖어들기 마련이다’라는 말대로입니다. 기독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내가 힘이라고 부르는 것, 진보사상입니다. … 기독교에서 나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며 그래서 나는 산이라도 옮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에는 덕어(德語, 독일어)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학생회를 조직하고 개화사상과 독립의식을 일깨웠습니다. 이에 정부는 일본에 망명중인 박영효를 영입하려 한다는 혐의를 씌워 그를 체포하고 한성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성서와 찬송가, 기독교서적을 읽으며 큰 감동을 받았고, 영문서적을 읽으며 실력을 쌓았습니다. 동시에 이승만 양의종과 옥중학교를 열고 성경, 영어, 지리 등을 가르쳤습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독립협회 관련자 등 감옥에 갇혀 있던 양반 지식층이 기독교로 집단 개종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의 개종은 기독교 교인의 신분 계층 변화의 계기가 되어 한국 기독교를 질적으로 한 단계 끌어 올리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출옥 후인 1903년 봄, 미국에 유학하여 남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1912년 모교인 배재학당에서 한국인 최초의 교장이 되어 학교 발전에 헌신하였습니다. 현대식 교사를 건축하였고, 학당 체제를 개편하여 ‘고등보통학교’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1920년부터 15년 동안 서울 YMCA의 총무로 활동하였습니다. 먼저 1922년에 일본 YMCA에 속하였던 한국 YMCA를 독립시켰으며, 1924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YMCA 세계동맹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한국 YMCA의 국제적 위상을 올렸습니다. 동시에 그는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상황을 알리면서 독립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총무로 취임한 해부터 파탄 난 농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서울 근교의 농촌에서 생활하며 농촌 현실을 조사하였고, 이를 토대로 ‘정신적 소생, 사회적 단결, 경제적 향상’을 목표로 하는 YMCA 농촌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농촌사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YMCA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미국이나 영국을 통해서 들어왔다. 영국 YMCA는 산업 혁명의 소산이요, 미국 YMCA 역시 농촌에서보다 도시에서 번창했다. 허나 한국인은 8할 이상이 농촌에 살기 때문에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방식을 그대로 따를 순 없다. … 그러므로 한국 YMCA는 다른 나라 도시 YMCA의 방식과 설비와 조직을 그대로 직수입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대다수가 사는 농촌에서 새로운 방식과 설비와 조직을 만들지 않고서는 무의미하다.”

 

이후 15년 동안 YMCA 농촌사업은 문맹 퇴치를 위한 계몽 활동, 농사 개량을 위한 협동조합 활동, 농촌지도자 양성이란 세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또 신흥우는 1925년 흥업구락부를 조직하였습니다. 흥업구락부는 표면적으로는 국민의 복리 향상과 산업 진흥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실제적으로는 민족 관념을 보급하고 조선 독립을 도모하여 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운동자금을 지원하는 일종의 정치적 비밀결사 조직이었습니다. 회원들을 상류 유식계층에 속하는 기독교 목사와 장로, 교사 등 사회 유력자들 중에서 엄선했기 때문에 이 단체는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1938년에는 흥업구락부가 다른 사건을 조사하던 중 발각되어 신흥우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견디기 힘든 가혹한 심문을 받았습니다. 흥업구락부 관련 인물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으므로 일제는 이들을 자신들의 정책을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일제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사상전향 성명서’를 발표하여 석방되었고, 이후 이들과 창씨개명과 친일강연회 등 노골적인 친일 행각에 동원되어 철저히 이용당하였습니다.

 

 

결론

 

신흥우는 어린 나이에 배재학당에서 근대적 세계관을 습득하였고, 이를 통해 봉건적 관념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이곳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어 삶의 목적과 방향을 크게 바꾸었습니다. 개인의 출세 중심의 삶에서 자신을 희생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사회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삶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1920년부터는 YMCA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외교운동과 민족 실력 양성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외국을 자주 드나들 수 있는 이점을 이용하여 한국의 현실을 외국에 알렸고, 한국의 독립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동시에 합법적인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YMCA 농촌사업을 전개했습니다. 농촌사업은 몰락한 농촌사회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민족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비록 당시의 시대적 제약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민족의 독립’과 ‘독립역량의 건설’을 실천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기독교 신앙을 갖게 이후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이야기해 봅시다.

 

2. 교회와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3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