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3과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사진 출처 : 스포츠경향
● 성경봉독 : 에스더 4:13~17
● 참고성경 : 출애굽기 2:23~25
● 요절 :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서론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3월이면 흥얼거리게 되는 ‘유관순 노래’이지요. 그리고 떠올리게 되는 인물은 유관순(柳寬順)입니다. 3·1독립운동의 상징이며 영원한 우리 민족의 누나입니다. 유관순은 여성, 그것도 어린 학생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겨레의 과제를 온 몸으로 떠안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끝까지 자신을 희생하는 불꽃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유관순은 기독교 신앙에 입각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옥중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민족독립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유관순은 국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누나’의 혼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본론
유관순은 1902년 충남 천안의 선비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은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인 후 향리에 흥호학교를 설립한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여 지령리교회(현재 매봉교회)에 출석하면서 구국의 방법과 신념이 기독교에 있음을 자각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계몽에 헌신하였습니다.
유관순은 바로 이러한 가정적인 배경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활달하고 의협심이 강해서 매사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신앙이 든든한 소녀’ 유관순은 당시 지역의 순회선교사였던 샤프(A. H. Sharp, 史愛理施)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샤프는 유관순을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도록 주선하였습니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에 다니던 시기에 두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는데 한 사람은 정동제일교회의 손정도 목사였고, 또 한 사람은 이화학당의 박인덕 선생이었습니다. 그녀는 주일이면 정동제일교회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당시 담임목사였던 손정도 목사의 설교를 통해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크게 자라났습니다. 박인덕 선생에게는 신앙의 에너지를 나라 사랑의 실천으로 승화시켜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유관순은 성경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애를 썼고, 새벽이면 채플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거르지 않았습니다.
유관순은 고등과 2학년 때 3·1운동을 맞았습니다. 당시 이화학당 내에는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학생단체, ‘이문회’(以文會)가 있었는데 회원들은 학생 동원을 책임진 박희도의 요청에 따라 3월 1일을 기해 대한문 앞에 나가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프라이 당장과 서양인 교사들이 만류했지만 유관순은 동료들과 같이 이를 뿌리치고 기숙사 뒷담을 넘어 탑골공원으로 달려가 만세시위에 참여하였습니다. 3월 5일에 열린 서울지역학생연합시위에도 적극 참여하여 만세를 불렀습니다.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휴교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고향에서 유관순은 매봉교회 교인들과 본격적인 만세시위를 준비했습니다. 유관순은 아버지 유중권과 삼촌 유중무, 같은 이화 동창이자 사촌 언니인 유예도, 홍호학교를 세웠던 조인원 부자 등과 교회에서 서울의 만세 시위운동의 정황을 토론하고 병천 지역을 중심으로 한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구체적인 방침을 정하였습니다. 만세시위 날짜는 4월 1일(음력 3월 1일) 병천(아오내) 장날로 정했습니다. 유관순은 연락과 조직 사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녀는 20여 일 동안 천안 청주 연기 진천 일대를 왕복하면서 만세 시위운동 조직을 위해 온 힘을 다 쏟았습니다. 어린 소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독립을 향한 열정으로 극복했습니다. 시위 전날 유관순은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드디어 4월 1일 천안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 여섯 고을에서 모여든 3천여 명이 병천 장터에서 만세세위를 벌였습니다. 오후 1시 경 조인원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유관순의 독립 연설이 있은 뒤 행진에 들어갔습니다. 그날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났는데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총에 맞아 희생되었습니다. 병천 운동은 호서지방을 대표하는 3·1운동이자 충청남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한 운동이었고, 전국적으로도 가장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유관순도 그날 체포되어 천안헌병대에 구금되었고 다시 공주 법원검사국으로 넘겨졌습니다. 이곳에서 공주 영명학교 대표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온 오빠 유우석을 만났습니다. 1919년 5월 9일에 열린 초심에서 유관순에게 5년 형이 내려졌지만 이에 불복하여 항고하였습니다. 1919년 6월 30일에 열린 경성복심법원 상고심에서 유관순은 일제의 부당한 재판을 받을 수 없음을 항변하면서 의자를 집어던지는 등의 저항을 했고,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1920년 3월 1일에는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옥중 만세시위를 죄수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이 만세운동에 절도 강도 파렴치범 사기범 등으로 수감되어 있던 이들까지 합세하여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함으로 방광이 터졌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1920년 9월 28일 옥중에서 19세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결론
유관순의 죽음을 알게 된 이화학당 당장 프라이와 교사 월터가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하였으며, 10월 14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김종우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인해 가족과 학생 대표 몇 명만이 참여한 쓸쓸한 자리였습니다. 그녀의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의 군용기지로 전환되어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는 과정에서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유관순의 고혼(孤魂)이라도 편히 쉬게 하고자 1989년 10월 12일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招魂墓)를 봉안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유관순에 관한 사실이 이화학당 교사였던 박인덕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으며, 1947년 8월 신봉조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순국처녀 유관순기념사업회’를 발족해 그의 신앙과 나라사랑을 기렸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 단장을 추서하였습니다. 1988년에는 유관순 등이 옥고를 치른 서대문 감옥 건물 등을 사적 324호로 지정,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민족의 자존과 자주정신을 일깨워주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유관순이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영향을 끼친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2. 교회 혹은 선교회에서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사람들을
기릴 수 있는 방법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독립기념관을 비롯한 관련 유적지 답사 등)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3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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