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2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나효선 2013. 2. 28. 23:35

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2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사진 출처 : ‘꽁치’님 http://blog.daum.net/zoo1360/12348479

 

 

● 성경봉독 : 디모데후서 2:20~21

● 참고성경 : 마태복음 25:14~30

● 요절 :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 2:21)

 

 

서론

 

2월에 살펴볼 인물은 박에스더(朴愛施德)입니다. 본명은 김점동(金點童)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된, 한국 최초의 여의사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에 비해 박에스더의 생애와 신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서른다섯 살밖에 살지 못했지만 자기 자신 전체를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헌신하여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녀는 신앙 체험을 통해 일생을 주님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였으며, 의료 활동이란 방법을 통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한 사람입니다.

박에스더는 한국 근대 과학사에서도 한국 최초의 여성 과학자로 평가 받습니다. 그리고 미국 감리교회 의료선교역사에서도 ‘유일한 동양인이자 유일하게 순교자의 숭고한 대열에 든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본론

 

박에스더는 서울 정동에서 1876년에 태어났습니다. 평범한 선비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가난 때문에 정동에 정착한 미 감리회 초대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의 집에 들어가 잡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어린 그녀는 선교사들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여기에다 미 감리회 여선교사였던 스크랜턴 대부인(M. F. Scranton)이 한국 최초의 신식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집할 때인 1866년 11월, 그녀는 할머니의 완고한 고집을 꺾고 아버지의 후원 속에 이화학당에 입학하였습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이화학당에서 영어·산수 등 일반 과목 외에 주기도문·찬송·기도 등의 예배의식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는데 박에스더는 이러한 예배의식을 통해 영적인 각성을 하였습니다. 특히 1888년 어느 여름,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에 마음속에 확신과 평안을 느끼는 신앙체험을 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날 밤 그녀는 죄에 대한 뚜렷한 인식과 두려움으로 영혼의 불안함을 느끼던 중 죄를 자백하고 구원을 비는 기도를 통해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믿음의 확신을 얻은 그는 다른 동료 학생 2명과 1891년 1월 25일 올링거(Ohlinger)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에스더(Esther)라는 세례명을 얻었습니다.

박에스더는 이화학당 시절 영어 실력이 뛰어나 선교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또 1890년부터 여성전용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 후에 동대문부인병원) 의사이자 이화학당 교사로 활동한 셔우드(Rosetta Sherwood)의 통역과 간호보조도 맡았습니다. 셔우드는 보구여관에 의학훈련반을 시작하여 기초 의료를 가르쳤는데 박에스더는 그 반 학생이 되어 서양의학을 배웠고, 셔우드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를 지도했습니다. 셔우드는 1892년 6월 같은 의사이자 선교사로 온 홀(W. J. Hall)과 결혼하여 홀 부인이 되었고, 박에스더는 1893년 5월 24일 홀의 조수였던 박유산과 결혼한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이름을 김에스더에서 박에스더로 바꾸었습니다. 박유산은 그녀에 비해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기에 부모의 반대가 있었지만 박에스더는 이를 신앙으로 극복했습니다.

 

“3일 동안 저는 뜬눈으로 고민했습니다. … 만일 하나님께서 박씨를 저의 남편으로 삼고자 하시면 지체가 높고 낮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어머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지체가 높고 낮음을 개의치 않습니다.”

 

결혼한 홀 부부가 1894년 5월 평양 개척선교의 사명을 안고 평양으로 파송되자 박에스더 부부도 동행하였습니다. 그러나 1894년에 일어난 동학난과 청일전쟁 중에 구휼활동을 벌이던 홀이 11월 갑자기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 홀 부인의 주선으로 박에스더는 미국에 유학하게 되었고, 1900년 6월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 대학교)을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 그녀를 뒷바라지하던 남편 박유산이 아내의 졸업을 21일 앞두고 폐결핵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때 한국에 다시 나와 활동하던 홀 부인이 어렵게 생활하는 박에스더를 불쌍히 여겨 귀국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박에스더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결코 포기할 수 없음을 알렸습니다.

 

“제가 지금 여기에서 이것을 포기하면 다른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고, 최선을 다한 후에도 도저히 배울 수가 없다면 그때 포기하겠습니다. 그 이전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의사가 된 박에스더는 귀국하여 서울 보구여관에서 의료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03년에는 홀 부인이 평양에서 기홀병원(紀笏病院)을 시작하자 다시 홀 부인과 합류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박에스더는 부임한 지 10개월 만에 3천 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의료활동과 함께 그는 미 감리회 여선교회 선교사로 임명받아 황해도·평남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벌였고 홀 부인이 기홀병원 안에 설립한 맹인학교와 간호학교의 교사로도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나 과중한 업무와 결핵으로 그녀는 1910년 4월 13일 서른다섯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박에스더와 늘 함께 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홀 가족의 슬픔은 남달랐습니다. 특히 박에스더를 유난히 따랐던 홀 부인의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은 그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폐결핵 전문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셔우드 홀은 폐결핵 전문의사가 되어 한국에서 활동하며 크리스마스실 도입 등으로 결핵 퇴치 활동을 벌였습니다)

한편 1909년 4월 28일 경희궁에서 고종 황제가 친임한 가운데 대한부인회 등이 주최한 해외 유학 여성 환영회가 베풀어졌을 때 박에스더는 하란사(河蘭史), 윤정원(尹貞媛)과 은장(銀章)을 받는 영예를 안기도 했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2006년 11월 박에스더를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했고,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는 2008년부터 ‘자랑스런 이화의인(醫人) 박에스더상(賞)’을 제정하여 동문 여의사에게 시상하고 있습니다.

 

 

결론

 

박에스더는 10년 동안 의사로 활동했지만 단순한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최초의 여의사’라는 의미를 뛰어 넘는 의사였습니다. 그녀는 여성이 차별받는 봉건사회를 뛰어넘어 미국까지 유학하고 의사가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이웃과 사회를 위해 자신을 바친 ‘의로운 사람’(義人)이었습니다.

박에스더는 주님을 위해 자신을 바친 사람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사용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깨끗이 비운 사람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주님의 일에 사용하시고자 할 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순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아무리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한 인물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박에스더가 자신을 제약하는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2. 주님이 귀하게 사용하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나는 어떤 노력

    을 해야 할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3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