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과 길을 개척한 선구자 남궁억

나효선 2013. 2. 18. 01:28

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과 길을 개척한 선구자

남궁억               

 

 

사진출처 : 동아일보사

 

● 성경봉독 : 마태복음 4:18~22

● 참고성경 : 요한복음 14:1~11

● 요절: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 4:19)

 

 

서론

오늘의 한국 교회와 교인들은 일반인들에게서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산다고 하면서도 사회 문제와는 상관없이 교회 안에만 몰두하거나, 말과 행동이 다른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그들을 이끌어야 하는 사명과 책임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올해 월례회 공과는 이 같은 현상을 극복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평신도로 거듭나기 위해 감리교회의 역사적 인물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의 삶과 신앙은 감리교회, 특히 감리교회 평신도들이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역사적 인물들의 삶을 통해 우리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새 일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그 첫 번째의 인물은 남궁억(南宮檍)입니다. 남궁억은 언론인으로, 교육자로 활동했을 뿐 아니라 교회를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새 길을 내는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한 인물입니다.

 

 

본론

남궁억은 조선조 말기인 1863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양반집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불행하게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에 고생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용모가 준수하고 재질이 뛰어나 일찍부터 벼슬길에 나가 통역 등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1895년에는 내부 토목국장이 되어 종로와 정동의 거리를 확장하였으며 탑골공원도 건설하였습니다.

1896년 그의 삶이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일본과 청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조직된 독립협회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벼슬을 그만 두고 독립협회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 윤치호의 전도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종교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또 나수연 · 장지연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친로파의 숙청,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 공박, 노일협정의 부당성 지적 등으로 세 번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교육가로서도 활약했습니다. 잃은 나라를 구할 길은 인재를 기르는데 있다고 생각하여 교육에 뜻을 둔 것입니다. 1906년 양양에 현산학원을 설립하였고, 1908년에는 순한글로 된 <교육월보>를 창간했습니다.

1910년에는 배화학당 교사가 되어 기독교여성교육에 몸담았고 여성교육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역사교육과 진보적 여성교육에 중점을 두었는데, 영어를 가르치다가도 틈만 나면 한국역사를 가르쳤으며,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무궁화 꽃으로 삼천리금수강산을 수놓는 지도를 수본(繡本)으로 만들어 수를 놓게 했으며, 태극기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또한 야간에는 상동청년학원에서 영어와 영문법을 가르쳤으며, 한때 상동청년학원 야간부 원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1918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으로 낙향하였습니다. 모곡에 정착한 남궁억은 모곡의 주민들이 미신에 빠져 있고 세상의 변천에 대해 무관심함을 보고 이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여 밝고 명랑한 생활로 개선하는 동시에 교회를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곡교회(현재의 한서교회)를 설립하고 자신의 사재를 털어 열 칸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그 자신도 더욱 신앙생활에 힘써 새벽이면 유리봉에 올라가 기도했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교훈을 실천해 나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간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상을 실생활에 옮겨, 상놈의 손을 잡고 경어를 쓰면서 경대하였습니다. 동시에 이 예배당에서 모곡학교를 시작하여 청소년교육과 전도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학교 실습지에 학생들과 같이 무궁화 묘목 밭을 만들고 가꾸면서, 학교 운영비를 마련한다는 구실로 해마다 수십만 주의 묘목을 전국 기독교학교와 교회, 기독교단체, 가정 등에 분배하였습니다. 이른바 ‘무궁화동산 꾸미기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1922년에는 ‘봄 돌아와 밭 갈 때가 곧 온다’는 조국의 찬가를 불러 민중에게 새로운 소망을 불러일으켰으니 이것이 저 유명한 찬송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입니다.(일제가 애국성이 농후하다 하여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한 찬송가입니다)

1931년 2월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졸업식에서 축사를 하여 졸업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축사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강자를 도와서 부스러기 권세에 만족해 할 것이 아니라 약자를 살려주고 같이 강한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졸업생들에게 간절한 부탁은 내가 산속의 눈길을 걸을 때 생눈을 뚫고 원길을 찾아서 걸은 것처럼 여러분이 바로 걸어야 뒤에 따르는 사람도 바른 길을 걸을 것이니 본래의 갈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졸업생들에게 눈 덮인 ‘널미재’라는 높은 고개를 넘을 때 잘못된 길을 따라간 경험을 이야기 했습니다.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만 따라가다 보니 길이 아닌 잘못된 곳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발자국을 따라가지 않고 원래의 길을 찾아서 자신의 발자국을 내어 놓아 다음에 오는 사람이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발자국을 내어 다른 사람들이 뒤따르게 한 것처럼 졸업생들도 좋은 발자국을 내어 다른 사람들이 뒤따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부스러기 권세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약자를 도와 함께 강하게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남궁억 자신의 삶 자체를 간결하게 표현한 말이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항상 감시를 당하였고, 1933년 11월에는 춘천 십자가당 사건에 관련되어 구속당하였습니다. 옥중에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았기에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병보석으로 풀려나서는 교회 사업에 힘쓰다가 1939년 4월 5일, 7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유언은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목이나 무궁화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 되게 하라.”였습니다.

 

 

결론

남궁억은 일생 동안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민족운동과 언론 및 교육 활동에 큰 업적을 남겼기에 주위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활동의 영향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기에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남궁억은 우리 민족을 살리고, 우리 민족 모두가 함께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남궁억은 할 일 많은 이 세상에서 교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일하기 위해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고 민족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 뒤를 따르는 사람도 바른 길을 걷도록 모범을 보였습니다. 곧 길을 개척하는 선구자의 역할을 항상 감당한 것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주님을 따르는 길과 세상을 따르는 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2. 우리 사회와 나라를 위해 오늘의 감리교회와 교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이야기 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3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