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영적 각성으로 거듭나는 평신도”-4

나효선 2009. 5. 23. 00:15

영성생활의 사회화

복음을 위하여 행하는 일

                                                                                                      유영설 목사님(문래동감리교회)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소련 공산당 시절 강제노동 수용소에 “보리스 콘펠드”라는 유대인 의사가 배치되어 왔습니다. 그의 임무는 심한 병에 걸린 환자라도 일할 수 있다는 진단을 해줌으로써 노동현장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이것을 어기면 그도 사형에 처해질 수 있음을 경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그는 동료 죄수의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보리스 콘펠트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한 생명의 소중함과 한 영혼의 무한한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어느 날 총명한 젊은 죄수를 진단하다가 장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의 명령을 어기고 정성을 다해 치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어느 날 환자는 의사에게 “의사인 당신의 목숨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어려움을 알면서 도대체 왜 나를 살리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보리스 콘펠트는 예수님의 사랑과 한 생명이 너무나 귀중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날 저녁 환자가 ‘예수란 도대체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자기 방으로 간수 한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에 자기를 살린 의사가 그 사건이 탄로 나서 처형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보리스 콘펠트가 살렸던 청년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1974년에 서방세계로 추방당했던 솔제니친(Solzhenitsyn)이었습니다.

한 영혼을 살리고자 자기 생명을 내 놓았던 일은 보리스 콘펠트 만이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방법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참된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은 기독교에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된 자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과 한 영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통회하며 눈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잃어버렸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전과 산에서 부르짖었던 눈물의 기도가 끊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한 목자의 심정으로 전도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전도는 어렵다’, ‘전도해도 안 된다’고 호소하는 가운데 전도는 성도들에게 무겁고 부담스러운 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도보다는 자기 믿음 생활에 충실하자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전도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전도의 열정이 있는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줍니다. 팻말을 들고 ‘예수 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다니는 사람과 조용한 전철역 안에서 큰 소리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들 때문에 오히려 전도에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지 염려될 때가 많습니다. 거스름돈으로 받은 천 원짜리 지폐에 “주 예수님을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아멘”이라고 붉은 글씨를 고무인으로 찍어서 전도지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뒷면에는 “예수 믿으면 천국, 안 믿으면 지옥. 아멘”이라는 말씀을 찍어 넣었습니다. 사람들은 문서전도지를 줄때는 읽어보지도 않고 버리지만, 지폐에 찍힌 글은 버리지 않고 읽어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방법이 아니라 범죄행위에 해당합니다. 국가재산인 공용화폐를 훼손하는 일은 성숙한 신앙인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무례한 전도방법은 비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를 향해 마음의 문을 닫고 배척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전도방법은 사회적 관계를 고려해서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데 소홀했습니다. 무슨 방법으로든지 교인되게 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다보니 전도를 기능이나 기술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2만 달러의 국민소득을 바라보며,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언론매체들이 발달한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고학력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중심사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선교가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과 압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교회의 바른 사회적 역할, 교인의 바른 삶이 실천되지 않으면 전도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이상적인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관계 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마음이 넘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회심사건에서 복음의 진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특전이요, 의무이며, 상급 있는 일인 것을 알았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전도하기 위해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유한 자이지만 종이 되었고,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되었고,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아래 있는 자처럼 되었고,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전도에서 가장 중요한 ‘동일시’(identification) 원칙을 나타내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전도대상자라면 그가 누구이든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자기주장이나 신념,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는 공감하고 인정해주고, 함께 해주고,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얻고자 함이라”는 말이 4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구원코자 함이라”는 적극적인 표현을 합니다.

오늘날의 전도에서 빼놓아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일들은 복음의 사회적 실천입니다. 이제 우리의 선교는 교회안의 차원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시대와 이 사회에서 실천하며 나가야 합니다. 반면 성도 개인의 삶은 거룩한 인격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통해 믿음의 덕을 세워야 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과 함께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함께 놀아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다운 모습과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기를 갈망합니다.

오늘의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가 지역사회를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교회든지 반드시 지역사회로부터 사랑받아야하며, 주민들이 인정하고 신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21세기에 한국교회가 성장하고 선교사명을 다 하느냐, 아니면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느냐 하는 성패가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복음의 실천은 당연히 “나눔과 섬김”의 영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 교회공동체의 모습이 복음의 본질에 합당한 것이요, 효과적인 전도의 전략을 수행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인간 소외현상이 심해져가는 현대사회, 그리고 자신의 삶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나눔과 섬김을 통한 감동을 맛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체험하는 것만이 현대인들에게 참된 희망이요, 인생의 참된 의미입니다. 따라서 21세기 한국교회는 문화선교를 보다 심도 있게 연구하여 새로운 선교정책과 방법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시대적인 요청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전도 전략입니다.

한국교회는 어떤 형태로든지 첫째, 나눔과 섬김을 통해 선교하고 전도하려는 사고의 전환이 있어야합니다. 둘째는 한국교회 현실상 지금은 전도 자체보다도 전도의 접촉점, 즉 사회적인 관계형성과 신뢰를 구축하는 일에 마음을 열고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셋째, 교회는 갈등과 고통이 많은 우리 사회를 치유하며 평안케 하는 역할을 하면서 전도할 수 있는 전략이 있어야합니다. 그렇게 하자면 교회를 더 적극적으로 개방해서 주민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누구나 교회의 선교현장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포용적인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구원의 사건이 문화선교 현장에서 일어나도록 적극적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복음의 열매를 위하여 우리는 두 가지를 반드시 겸비해야 합니다. 첫째는 나의 구원을 확신해야 합니다. 내 영혼의 귀중함 때문에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주신 그분의 사랑에 감격해야 합니다. 그분의 은혜 안에서 자기 존재를 회복하고, 영적인 삶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물질과 시간을 쓰며 복음을 전해야하는 이유는 복음에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을 좀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된 자들의 사명입니다. 둘째는 기도로 겸비된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교를 해보니까 즐겁고, 재미있고, 보람 있는 일이기에 한다면 곧 한계를 맞게 됩니다. 한두 번, 혹은 일 년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풍성한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요, 막힌 일을 푸는 것도 성령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눔과 섬김의 영성으로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구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2007 평신도 월례회 공과』

 

   친구를 만나러 전철을 탔다. 눈이 피곤하여 눈을 감고 앉아있는데 어떤 분이 전도를 했다.

평소 길이나 전철에서 “예수를 믿으시오.” 하는 식의 전도 방법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냥 듣고 있었는데 힘 있으면서도 온화한 목소리로 간략하게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분의 표정이 어떤지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얼굴이 빛이 나고 입 꼬리는 말할 때마다 올라가서 밝은 표정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보니 나도 저런 얼굴이 되어야하는 본을 보여주셨다.

나부터 성화되도록 ‘경건훈련’을 잘 받아서 내면에서 우러나는 평안과 기쁨, 온유와 겸손으로 내 얼굴에서 빛이 나고, 얼굴만 봐도 은혜롭게 되도록 노력한다.

‘성화되어가는 나’를 보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답다.”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2009년 05월 22일 Daum블로그와 만난 지 669일째 입니다.

오후 11시 13분에 보니 방문자수가 40,000이 넘어있었다.

요즘 ‘인기’가 있나보다.

 

1987년 5월 23일(토)은 내가 ‘절망’이라는 것을 느낀 날이었다.

각막염으로 인해 교과서를 눈앞에 갖다 대야 글씨가 겨우 보이는 상태였다. 두 달 정도 치료받는 중인데 의사가 안압이 너무 높다고 말씀하셨다.

이러다가 장님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 장님이 되느니 죽겠습니다. 눈을 고쳐 주시면 가르치는 일을 더 열심히 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생활을 하겠습니다.” 기도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14개월이 지나 1988년 7월에 시력이 예전과 같이 회복되었다.

22년이 지난 2009년 5월 23일(토) 오늘은 ‘그 날의 기억’을 기억하고 있다.

그 날의 ‘절망’은 없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있다.

세상의 ‘부귀영화’ 또한 지나가리라.

‘헛된 것’을 붙잡느라 헛된 열정 · 에너지를 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