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영적 각성으로 거듭나는 평신도”-3

나효선 2009. 5. 1. 00:12

영성생활의 사회화

생명을 구원하는 헌신

                                                                                    유영설 목사님(문래동감리교회)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15:28)

             

러시아(Russia) 사람인 니콜라이 포포프가 쓴 “왜?”라는 글 없는 그림동화책이 있습니다. 이 동화는 개구리와 생쥐를 통해서 터무니없는 전쟁이 어떻게 일어나고 확대되는지 그리고 전쟁의 비참한 최후는 어떻게 되는지 우화로 보여줍니다. 호젓하게 잘 놀고 있는 개구리의 앉은자리가 탐이 났는지 생쥐는 개구리를 쫓아냅니다. 다음에는 더 큰 개구리들이 생쥐를 쫓아내고, 생쥐의 지원군들이 개구리를 몰아냅니다. 몰아내기 위해서 탱크를 몰고 오고, 그렇게 하다가 싱그러운 초원이 폐허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의 동화입니다.

이 책의 작가 니콜라이 포포프는 러시아 사라토브(Saratov) 사람입니다. 사라토브는 볼가(Volga) 강이 흐르고 숲이 많은 러시아 전통을 잘 간직한 작은 도시입니다. 작가는 이 도시에서 전쟁을 경험하며 지하대피소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경험이 있었습니다. 폭탄 파편을 주워서 장난감 놀이를 하다가 장애인이 되는 친구, 전쟁에 나갔다가 장애인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농부도 보았습니다.

우리는 전쟁의 참상을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 패배자가 될 뿐입니다. 지금도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세계평화를 외칩니다. 정치, 종교, 문화가 모두 평화를 위해 존재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정치를 위해서 전쟁을 하고, 같은 원리로 종교를 위해서 전쟁을 하며 평화를 깨뜨립니다. 지금 “왜?”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명은 어떤 부분을 제거하고 죽여서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여인은 흉악하게 귀신들린 딸이 있었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자식의 생명을 살리려는 노력과 의지가 우리에게 대단히 감동을 줍니다. 본문의 전개도 예수님의 치유행위에 중심을 둔 것이 아니라 여인의 태도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병자의 만남이 언급되지 않았고 병자가 예수님 앞에 직접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어미가 예수님께 나와서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마태복음 15:22). 이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마지막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의 간청에 한마디도 대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돌려보내 주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딸의 병이 치유되기를 소원하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인의 간절한 호소에도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마태복음 15:26)고 퉁명스럽게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자녀는 유대인이며, 개는 이방인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방인들에게는 모욕일 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향한 유대인들의 배타적 차별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은 병든 딸을 바라보는 고통과 안타까움 그리고 모욕과 차별 앞에서도 생명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귀신들린 딸이 낫기만 하면 그 정도의 모욕과 차별은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는 자세입니다.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간구 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닌 것을 인정하며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귀신 들린 딸자식을 고치기 위해 마지막 자존심까지도 포기한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을 발견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가나안 여인의 희생적인 자식 사랑과 같은 부모들의 희생적 사랑으로 성장했습니다. 오늘의 ‘나’는 부모의 희생적 사랑의 산물입니다. 어느 사회, 어느 역사를 막론하고 생명은 희생적인 사랑으로 보호되고 성장합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자기 새끼를 키우는 어미는 희생적입니다. 위험 앞에서 용맹스럽고 목숨을 다해 자기 새끼를 보호합니다. 하물며 사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좀 더 훌륭한 자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일하면서 당하는 모욕과 차별 육체적, 정신적 고통도 자식을 생각하며 참고 견딥니다. 자신의 육체적 한계나 자존심을 생각하면 금방이라도 포기하고 싶지만 자식을 생각하며 인생을 바칩니다.

제 친구가 서울에서 명문 대학을 다닐 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분이며, 아들이 서울에서 무슨 대학 어느 학과를 다니는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역에서 리어카로 날품을 파는 막 노동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희생적 수고가 훗날 아들이 교육학자가 되어 대학의 강단에 서도록 만들었습니다. 수고와 희생이 있는 곳에는 귀천을 막론하고 새롭고 건강하고 훌륭한 생명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법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제2차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 시내로 들어가서 신들린 젊은 여인을 만났습니다. 이 여인은 복화술로 점을 쳐서 자기 주인에게 돈을 벌어주는 일을 해 왔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이 여인을 고쳐주고 난 후 전도여행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귀신들린 여인을 소유하고 있던 주인은 더 이상 수입을 올릴 방법이 없게 되자 바울과 실라를 고소하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귀신들린 여인의 주인은 한 인간의 불행과 약점을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고 있는 악한 사람이요, 생명을 죽이는 자입니다.

오늘의 세상에도 이와 같은 약점을 이용해 쾌락을 누리고 돈벌이를 하는 못된 인간들이 존재합니다. 이유 없이 저지르는 처참한 살인사건, 자녀들을 죽이는 부모들, 불량식품을 제조해서 판매하는 자들, 인신매매, 원조교제, 노동착취 등 인륜을 저버린 생명 파괴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는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자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난해에만 2만 3천여 건에 1800억 원의 보험금 손실이 발생했을 정도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10년 전의 두 배가 넘는 수준으로 상승했습니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5년 사망원인 통계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사망자 수는 24만6000명으로 하루 평균 673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중 1만2047명이 자살로 생을 마쳤습니다. 지난해 인구 10만 명 당 자살률은 26.1명으로 전체 사망원인 중 4위로 집계됐습니다. 하루에 33명이 자살로 목숨을 잃는 셈입니다. 자살률은 1995년 11.8명(사망원인 9위)에서 꾸준히 증가해 2003년(24명)부터 사망원인 4위로 올라섰습니다.

통계청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가치관의 변화가 자살률이 높아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분석했습니다. 자살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가족 유대 등 사회적 통합이 약해져 가는 사회적 분위기도 영향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자살률은 OECD국가 중 가장 높았습니다. 연령 구조가 사망률에 미치는 영향을 제거한 연령 표준화 통계로 우리나라 자살률은 24.7명으로 나타나 자살률이 높은 22.6명인 헝가리(2003년 기준)와 20.3명인 일본(2003년 기준)보다 높았습니다. 미국(10.2명)이나 독일(10.3명) 등에 비해서는 두 배가 넘는 수준으로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길을 가르치는 책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모두 희생적 수고와 사랑을 받을 때 한 시대를 책임지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갈대 바구니는 자식에 대한 어미의 슬픔과 고통, 사랑과 관심이 담겨있는 생명의 보금자리였습니다(출애굽기 2:3). 다윗이 고난을 당하며 도망 다닐 때 그의 옆에는 진정한 친구 요나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흥하게 했던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길잡이 인생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 말미에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다”(로마서 16:4)고 회상합니다. 생명은 이런 수고와 희생을 통하여 지켜지고 성장합니다. 생명의 가치를 모르는 자는 생명을 죽이는 일에 쾌감을 느끼지만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는 생명을 살릴 때 기뻐합니다.

우리는 모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찬양처럼 사랑받고 존중되어야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도 내가 존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보호하려면 가나안 여인처럼 모욕과 수치, 고난과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의 딸은 고침을 받았고, 예수님은 딸의 병이 나았으니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이 장면을 ‘여인의 큰 믿음’때문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녀의 큰 믿음은 모욕과 수치, 고난과 희생을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2007 평신도 월례회 공과』

 

            

나는 어머니 조문사 장로님을 존경한다.

어머니가 ‘하나님 나라’에 가시기 전까지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마태복음 13:57)”는 말씀처럼 존경하지는 않았다.

1916년에 태어나셔서 주일학교에서부터 배운 하나님 말씀대로 평생 사시고,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여러 방면에서 지도자로서 활동을 많이 하셨지만 나에게는 그냥 ‘어머니’일 뿐이었다.

6남매(참진 오빠는 1951년 세 살 때 한국전쟁 피난 중에 말라리아에 걸려 ‘하나님 나라’로 갔다.)를 낳으시고, 몸조리와 영양섭취를 제대로 하시지 않아서 키가 줄어들고, 허리가 꼬부라지셨다. 어린아이처럼 나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93세의 어머니’이셨다.

그러나 어머니의 웰 다잉(well dying)을 직접 곁에서 지켜보니 이제는 어머니의 삶이 나의 롤모델(role model)이 되었다.

 

나는 4월 11일 오전 3시 40분 왼쪽 갈비뼈 바로 아랫배가 뒤틀리듯이 아파서 깼다. 119를 불러야 되나 생각하며 가방을 싸고, 인터넷 검색을 했다. 맹장은 오른쪽이고, 췌장 쪽인가? 하면서 신지식 내용을 보니 ‘늑간신경통’이나 ‘곽란’인 것 같았다. 30년 동안 지낸 대전에서 서울로 이사를 해야 하니 신경이 쓰여서 ‘스트레스로 인한 통증’인 것 같다. 날이 새기를 기다리다 구토증이 나서 토하고 나니 5시간 정도 아팠던 통증이 사라졌다. 12일 부활절에도 3시간 아팠고, 그 후 두 주간동안 아팠다가 나았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병원에 가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인터넷 검색을 해서 스스로 진단하다가 내일은 꼭 병원에 가야지 하고는 아프지 않아서 잊어버린 것이 며칠 되었다.

 

어머니가 물 한모금조차도 넘기기 힘든 그 아프신 상황에서도 아들인 나철진 목사의 오카리나 연주에 맞추어 ‘아침 해가 돋을 때’와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를 찬양하시고, 마지막에 남기신 말씀이 “I love you!”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유언이 아니다.

내가 잠시 배가 뒤틀리듯이 아파서 제대로 먹지 못한 경험에 의하면 아무 말도 하기 싫고, 너무나 힘들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 조문사 장로님은 3일 동안 드신 것이 거의 없는 그 고통 속에서도 “I love you!”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하나님 나라’에 가시는 여정과 ‘하나님 나라’로 가신지 한 달 후 꿈길에 오셔서 온몸이 빛이 나고 반듯한 몸으로 가볍게 다니시는 것을 본 이후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신 어머니를 존경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당신의 몸을 녹여서 우리 5남매를 키우셨듯이 나도 ‘나’라는 자아를 녹여서 헌신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상으로 받기를 바란다.

 

왜?

                                                                                                                      니콜라이 포포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