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영적 각성으로 거듭나는 평신도”-2

나효선 2009. 4. 12. 00:18

영성생활의 실제

고독 속의 침묵기도와 성찰기도

                                                                                   홍성주 목사님

성경봉독

   지난번에 영성생활의 중심은 기도라고 한바 있습니다. 기도다운 기도를 하려면 신자의 삶이 정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겸손, 순수한 생활, 그리고 특히 하나님만을 찾고 추구하는 단순생활을 토대로 한 영성생활이 없이는 응답받는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이 기도를 그렇게 많이 한 것 같은데 응답이 시원치 않다고 느끼는 것은,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 또는 사이가 그만큼 소원하다는 증거입니다.

많은 신자들은 ‘기도’라 하면 말하는 ‘음성기도’(Vocal Prayer)만 알고‘ 듣는 기도’(Listening Prayer)는 잘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말만 많지 내용이 빈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도한 내용도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또한 자신도 모르게 정욕과 이기심에 따른 기도가 되고 맙니다. 기도란 신자가 말하기 전에 먼저 영적인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을 듣는 게 도리가 아닐까요? 그 다음에 말하는 기도를 해야만 올바른 기도를 하게 되고, 따라서 응답받는 기도도 가능하게 됩니다.

 

1. 고독 속의 침묵기도(Silent Prayer in Solitude)

우리나라 신자들은 배우고 들은 게 많다보니 어디서나 말들이 많습니다. 말이 많으니, 자연히 과언과 식언이 나오고 분쟁이 나고 싸움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침묵(沈黙)과 관조(觀照)와는 거리가 멉니다. 침묵생활과 침묵기도를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음식을 빨리 먹고 과식하는 것이 건강에 좋지 않듯이, 말을 빨리 하고 많이 하는 것 역시 육신의 건강과 영적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신자는 특별한 일 없이 남녀친구를 만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만나서 좋은 일도 있겠지만,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는 상호간에 상처만 줄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도 목회자도 허물과 부족함이 많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만난다면 서로 용서하며 관용하며 사랑할 수 있는 관계가 됩니다.

침묵기도란 바로 듣는 기도의 일환입니다. 잘 들으면 잘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잘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훈련의 하나인 침묵기도를 해야 합니다. 침묵에는 외적침묵과 내적침묵이 있습니다. ‘외적침묵’은 하나님께만 집중하기 위해서 밖에서 오는 소리들을 차단 또는 빨리 지나가게 하는 것이요, ‘내적침묵’은 내 속에서 솟아나는 여러 가지 생각과 잡념, 상상과 욕망들을 제거하거나 지나가게 하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목적이니, 침묵기도를 하다가 떠오르는 생각과 여러 가지 것들에 빠져들지 말고, 버스를 보내듯이 그것들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침묵기도를 할 때에 3가지의 침묵이 필요합니다. 즉 말을 침묵시켜야 하고, 욕망을 침묵시켜야 하고, 생각을 침묵시켜야 합니다. 말을 침묵하면 완전하게 되고, 욕망을 침묵하면 좀 더 완전하게 되고, 생각을 침묵하면 가장 완전하게 됩니다. 생각을 침묵한다는 것이 제일 어렵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침묵기도를 하다보면 우리의 중심에 이미 와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되고, 엘리야가 들었던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왕상 19:12)도 듣게 되고, 아울러 우리의 성격도 변화되고 삶도 변화됩니다.

고독이란 외로움이나 쓸쓸함 또는 소외를 말하지 않고, 사람이나 세상보다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만나려는 ‘거룩한 자세’를 뜻합니다. 또한 고독 속의 침묵기도란 이런 거룩한 자세와 사람이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곳에서 침묵기도 함을 의미합니다. 고독이 없는 침묵은 불완전하고, 침묵이 없는 고독은 무가치합니다. 침묵과 고독은 협력의 관계입니다. 침묵이 고독을 현실화하고, 고독은 침묵기도를 완성시킵니다.

예수님이 바로 고독과 침묵기도를 창시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듣는 기도와 말하는 기도를 모두 완벽하게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많이 하셨는데 침묵기도와 성령님의 철저한 이끌림을 받는 영(靈)기도(관상기도, Contemplative Prayer)를 고독과 침묵 속에서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공생애 직전에 40일간의 금식기도, 12제자를 선택하기 전의 기도,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신 후의 산 기도, 마지막 가장 거룩한 주간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등 모두 고독 속에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궁극적 승리의 원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2. 성찰기도(Reflective Prayer)

‘성찰기도(省察祈禱)’는 자기를 성찰하고 회개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나라 개신교회가 요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은 이런 자기성찰과 회개가 부족한 탓입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두 가지 성찰을 말합니다.

첫째는 ‘의식의 성찰’이고, 둘째는‘양심의 성찰’입니다. 우리는 의식의 성찰을 통하여 하나님이 오늘 하루 동안 어떻게 현존하셨는지,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그 현존하심에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발견합니다.

양심의 성찰에는 ‘특별한 성찰’과 ‘일반적인 성찰’이 있습니다. 특별한 성찰은 특수한 죄나 허물에 대한 것이고, 일반적인 성찰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전체적인 행실에 대한 성찰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요 여행객으로서, 이 문제 많고 죄악 많은 세상을 살아가기에 늘 자기성찰이 필요합니다. 감리교 창설자 웨슬리(John Wesley)는 “나는 사랑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유별난 성결이 필요하지 않다. 나는 항상 기도하기 때문에 사적인 기도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나는 항상 깨어 기도하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자기성찰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생각을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자의 모든 삶이 그러하듯이 자기성찰 역시 우리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이시여! 우리가 이런 말과 행동을 왜 했는지 그 죄의 원인과 근본동기를 알려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성찰이 있은 후에는 회개가 뒤따릅니다. 회개 역시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회개는 ‘돌아섬’과 ‘돌아감’으로 구성됩니다. 돌아섬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관성과 사악한 삶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것을 뜻합니다. 돌아감은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가는 결단입니다. 회개는 때에 따라 금식과 철야기도, 구제와 나눔, 영혼의 고통과 눈물과 신음을 수반하기도 합니다.

 

3. 침묵기도와 성찰기도의 훈련과 실제

1) 침묵기도의 훈련

① 고독 속의 침묵기도를 하기 위해 기도하기 5분 전에 한적(조용한)한 곳에 갑니다. 가능한 동일한 장소에서 기도합니다.

② 무엇보다 성령님의 도움과 인도를 구합니다. 즉 침묵기도가 제대로 되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발견하도록 간단하게 기도합니다.

③ 남의 방해를 받지 않는 때를 택하여 오전 20분 이상, 오후에 20분 이상 두 차례 침묵기도를 합니다. 계속해서 침묵기도를 반복하다보면 나를 발견함과 아울러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도 듣게 되고 참된 기도를 하게 됩니다.

2) 성찰기도의 훈련

① 하루에 2번 이상 또는 잘못이 생각날 때마다 언제든지 자아를 성찰하며 회개의 시간을 갖습니다.

② 새 신자들은 ‘십계명’을 하나하나 묵상하며 성찰기도를 합니다. ‘확실한 응답’(?)을 들으려고 점쟁이 집을 기웃거리는 즉 십계명도 지키지 못하는 신자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오랜 신자는 ‘팔복’이나 ‘주기도문’ 등으로 성찰기도를 합니다. 오래 믿었다는 것만이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했는데, 과연 오랫동안 믿은 내 마음의 상태는 어떤가를 돌아봅시다.

③ 침묵기도와 성찰기도는 연관성이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침묵기도를 하면 자기성찰이 되며 철저한 회개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영성이 건강하고 깨끗한 신자는 주님께로부터 크게 쓰임을 받습니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2007 평신도 월례회 공과』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태복음 22장 8 -14절)

 

어느 누구나 빈부귀천(貧富貴賤),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莫論)하고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도록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신다.

그러나 아무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고 흘리신 피로 인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의(義)인 ‘회개라는 예복’을 입어야만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게 된다.

‘회개라는 예복’을 입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은 강도 두 사람 중의 한 명은 죽기직전에 ‘회개’를 하였기에 십자가형이라는 극형을 받은 흉악한 죄인이 천국에 들어갔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3장 39 -43절)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느낀 최초의 감정이 ‘부끄러움’이다.

다윗 왕이 십계명을 어기는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 앞에 자복(自服)하고 회개(悔改)하였기에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

 

인간은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에 지은 죄를 ‘회개’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나 다 회개하지는 않는다.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거나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하나님의 뜻이라고 호도(糊塗 )하는 사람들도 있다.

“‘회개라는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유구무언이 될 수밖에 없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 지엄(至嚴)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의 이모작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 · 섭리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좋은 길로 이끌어주실 것을 믿는다.

예수님의 성품인 ‘온유’와 ‘겸손’을 닮도록 노력한다.

자기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를 드린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 하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