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22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1월 신사참배거부 최인규 권사의 순교

나효선 2022. 11. 11. 23:50

기독교대한감리회 2022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1월 목사를 부끄럽게 만든 권사

신사참배거부 최인규 권사의 순교

 

4단원 역사의 모범, 감리교회

 

찬송 :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성경봉독 : 시편 8:1~9

요절 :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편 8:4~5)

 

 

 

신사참배하면 누가 생각납니까? 대부분 망설이지 않고 주기철 목사님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하신 대표적인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밖에 없나요?”라고 한 번쯤은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장로교회에 주기철 목사가 있다면 감리교회에는 최인규 권사가 있습니다. 최인규 권사는 감옥에서 동방요배까지 거절하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신 분입니다. 더구나 최인규 권사는 흔적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다가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최인규 권사의 신앙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목사를 부끄럽게 만든 권사라는 별칭이 만들어진 것은 대전형무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와 불경죄로 복역중이던 이진구 목사와 만나면서부터였습니다. 훗날 이진구 목사의 회고를 재구성한 자료에 의하면 신사참배뿐만 아니라 황국신민서사와 동방요배까지 거절하고 간수들에게 매를 맞는 것이 안쓰러워 권사님, 동방요배나 신민서사는 그냥 한다고 하세요라고 했다가

 

목사님은 신민서사와 동방요배를 기쁨으로 하십니까?

나는 양심으로 사는 사람이므로 그것에 대해서는 다시 말을 마십시오

 

라는 답을 듣고서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목사로서 양심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최인규 권사는 63, 이진구 목사는 42세였습니다. 최인규 권사는 2년 형을 받았는데 형기를 마치지도 못하고 수감 1년 만인 19421216월 형무소 병감에서 별세하였습니다. 별세 소식을 들은 집안 조카뻘되는 최종대가 대전에 가서 시신을 화장한 후 유골을 가져왔는데, 장례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고 야산에 묻어두었다가 해방되는 해 10월 삼척교회 입구에 묘소를 만들었습니다. 그 이듬해 최인규 권사 순교 기념비를 무덤 위에 세웠습니다. 현재 이 기념비는 도시계획으로 인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198611월 천곡교회에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를 세우면서 그 옆에 자리 잡았습니다. 최인규 권사는 강원도 삼척군 북삼면 송정리(현 동해시 송정동)에서 출생한 강릉 최씨 집안사람입니다. 부인은 일찍 죽고, 행복하지 않은 가정생활 때문에 마을에서는 술 잘 마시는 난봉꾼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북평교회 김기정 목사와의 만남 이후 방탕한 생활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전덕기 목사의 술의 해됨이라는 글을 읽고 회개하여 술, 담배를 끊고 가정생활에도 충실하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 믿은 지 8년 만에 북평교회 권사가 되었다가 천곡교회로 옮깁니다. 천곡교회는 주막을 하다 며느리의 전도로 북평교회 교인이 된 권화선 속장이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6~7년 동안 북평까지 먼 길을 걸어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자신이 사는 마을에도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하여 재산을 털어 19328칸짜리 초가 예배당을 건축한 것입니다. 그리고 건축할 때 도움이 되었던 최인규 권사에게 설교자로 함께 사역하자고 제안하여 권화선 속장은 전도부인으로, 최인규 권사는 설교와 가르치는 일로 천곡교회의 두 기둥이 되었습니다.

 

1935년 최 권사는 자신의 전 재산인 토지 전부를 팔아 논 1,900, 4,200평을 마련, 교회에 헌납하였습니다. 또 시장에 나가서 집 없는 사람들을 전도하여 교회로 데리고 와서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처럼 서로 통용하는 신앙공동체를 가꾸었던 것입니다. 최인규 권사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수시로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며 거부하도록 설교하였습니다. 신사참배 같은 종교적행위는 물론이고 동방요배나 일장기 경례 같은 정치적행위도 거부하였습니다. 심지어 세금이나 부역도

 

나는 생명과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하늘나라 백성이다.

따라서 하늘나라 일이 아닌 부역이나 세상일은 할 수 없다

 

라며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19405월 삼척경찰서에 연행되어 온갖 고문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협박하고 설득해도 넘어가지 않자 경찰은 최권사에게 망신을 주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을 주려는 속셈으로 최권사에게 똥지게를 지우고 나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최인규요하면서 동네를 돌게 했습니다. 그런데 최권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내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최인규요! 내가 예수를 믿는 최인규요!’

 

라고 외치며 동네를 돌았다고 합니다. 체포된 후 경찰서의 혹독한 고문으로 고통받는 것이 안타까워 친구인 북평교회 차국성 권사가 평소 안면이 있던 일본인 경찰서장을 찾아가 최인규가 예수 믿기 전 정신병을 앓은 적이 있는데, 그 병이 재발한 것 같으니 풀어 달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경찰서장이 최인규가 미친 것이 아니고 당신이 미쳤소. 당신도 믿으려면 최인규처럼 믿어라고 하는 바람에 얼굴을 못 들고나왔다고 합니다. 이뿐 아니라 당시 감리교회는 예배에서까지 동방요배와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고, 모든 행사에 여선교회와 교회학교어린이들이 동원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른바 194048일 공표된 [종교단체법]으로, 정체성 없는 변질된 교회로 전락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천곡교회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는데 세금부과와 부역 지시가 있었으나 일본을 위한 일이기에 최권사는 단호하게

 

나는 재산과 생명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고 하늘나라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하늘나라 일을 하지 부역이나 다른 것은 못 하겠다

라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최인규 권사는 기독교 신앙을 통해 삶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민족을 세운 믿음의 선조입니다. 최인규 권사는 차가운 감옥에서 이 땅에서의 삶을 마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삶은 경이롭게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오늘 우리는 최인규 권사의 순교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가 저항하고자 했던 우상이 무엇이었는지,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삶을 집어삼키려고 새로운 얼굴과 모습으로 덤벼드는 우상은 과연 무엇일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성찰을 위한 질문

 

1) 동방요배, 신민서사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세요. 신사참배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2)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생각하고 참여했던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신이 일제강점기에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22년 월례회 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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