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22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0월 목사가 된 머슴 김창식 목사

나효선 2022. 10. 5. 01:41

 

기독교대한감리회 2022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0월 목사가 된 머슴

한국교회 최초 목사는 감리교

 

4단원 역사의 모범, 감리교회

 

찬송 : 40장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1:22~31, 로마서 12:16

요절 :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린도전서 1:27~28)

 

 

 

한국교회 최초 목사안수식은 1901514일 상동교회에서 열렸습니다. 이때 김창식, 김기범 두 분만 안수를 받았습니다. 감리교회는 제도상 연회에서 감독이 목사안수례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한국감리교회는 아직 연회가 구성되어 있지 않아 한국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중국 화북연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정식 한국감리교회 조직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한국에서 행해진 목사안수식이었고, 최초로 한국인 목사가 배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장로교회에서는 1907년을 한국 최초의 목사가 배출된 시기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식으로 신학교 과정을 마쳐야만 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 최초의 공식적인 목사안수식은 1901년이라는 사실입니다.

 

 

1901514일은 중국화북연회 한국선교회 연회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이날 한국 개신교회 목사가 최초로 탄생하였습니다. 감리교회 기관지인 신학월보19016월호를 보면 목사 안수의 의미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연환회에서 제일 긴요한 일은 대한 전도사 중에 김창식과 김기범 양씨를 선정하여 성품 주심이니라, 대게 우리 대한 예수 각명교회 중 전도하는 선생이 많으되 그중에 목사품이 있어 세례 줄 권세와 혼례를 행할 권세 중에(중략) 우리 대한 미이미감리교회 중에 품을 가진 목사의 수효는 가장 적고 추수 걷어둘 것이 많아 구주 분부하신 대로 우리 연환회에서 추수하는 주인에게 구하여 일꾼을 보내어 추수하게 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성신이 정령 인도하심으로 김씨 양제를 택하여 이 엄한 업을 맡게 하였느니라

 

이날 안수를 받은 두 사람 중 김창식은 선교사들로부터 조선의 바울이란 칭호를 받았던 한국 개신교 개척시대 전설적인 전도인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김창식의 영문표기가 ‘Kim Changsiki’로 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김창시기라고 읽게 되는데, 이는 김창식을 사람들이 어이, 창시기라고 하대하여 불렀기 때문입니다. 황해도 수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창식은 자라면서 농촌생활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15세에 가족들 몰래 가출합니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의 집 머슴살이였습니다. 그렇게 머슴부터 출발해서 마부, 지게꾼 등 밑바닥 일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29세에 결혼을 하고 서울 남대문에 정착을 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이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헛소문이 퍼지면서 흥분한 사람들이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과 학교를 때려 부수곤 했습니다. 김창식도 그 소문을 듣고 선교사의 만행현장을 잡기 위해 마침 사람을 구하고 있던 올링거 선교사의 집에 이른바 위장취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의 집에서 일하는 동안 아무리 살펴봐도 소문 같은 만행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선교사들은 예의 바르고 정중했으며, 무엇보다 올링거 선교사와 친구 선교사들이 고종임금을 자주 만나는 위치에 있지만, 하인인 자신을 향한 손길이 너무나 따듯했습니다. 하인은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조선의 양반과 너무도 달랐습니다. 감동한 김창식은 선교사들의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어 취업 2년 만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후 1893년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짝이 되어 평양선교를 개척하는 데 큰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이 일로 평양사람이 주목을 받던 중 18945월 평양기독교도박해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제임스 홀이 미국 외교 라인으로 조선정부에 압박을 하여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거의 시체 상태로 나왔습니다.

 

감옥에서 배교를 강요받으며 고문당할 때 김창식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로제타 홀의 1894510일 일기에 나와 있습니다. “홀 박사가 그(김창식)를 보기 위해 갔다. 그는 좌절감에 빠져 자포자기한 것 같았다. 계속되는 심한 매질과 죽음의 위협에 이 불쌍한 친구가 수백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그들이 김창식을 오씨나 한씨보다 더 심하게 때리고 위협하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포기하라는 요구에 불응하고 있을 뿐 아니라 풀려나면 복음 전파를 그만 두겠느냐는 물음에도 계속 전파하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바울(Korean Paul)로 인해 주님께 찬양을 드린다.” 또 다른 로제타 홀 선교사의 기록(19296, The Korea Mission Field)에는 내가 본 김창식 목사는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섬겨온 40여 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그의 고귀한 모습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와 같은 강직한 사람이다. 그는 한국에서 내가 사역하는 데 있어 개인적으로 나에게 가장 커다란 힘이 되었던 자이다. 그의 모범은 우리 모든 기독교회에 있어 가장 커다란 영감을 안겨준다(중략)”라고 적혀 있습니다. 김창식 목사님은 1924년 정년 은퇴하기까지 영변, 수원, 해주 지방을 돌아다니며 125곳에 교회를 개척하였고 48군데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그런 그에게 조선의 바울이란 명칭을 붙여 주었습니다. 머슴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되었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낮은 자의 겸손과 순종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이, 창식이, 창식이!” 하는 소리를 듣고 선교사들은 그의 이름이 김창식이인 것으로 착각하고 영문으로 표기할 때, ‘i()’자 하나를 더 넣었지만, 김창식은 굳이 그것을 빼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낮은 자리가 자신이 떠날 수 없는, 떠나서는 안 될 은혜의 자리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감리교회 최초 목사안수는 한국교회 최초 목사안수였습니다. 장로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신학교 졸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이야말로 진정한 목사요, 진정한 지도자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성찰을 위한 질문

 

1) 지도자의 권위는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합니까?

 

 

2) 여러분과 교회 목사님과의 관계와 김창식과 홀 선교사와의 관계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22년 월례회 공과

 

자랑스러운 한국감리교회 열 두 가지 이야기

 

 

김창식 목사

 

 

1898년 본처전도사 및 교인연합모임, 정동제일교회

(왼쪽이 김창식, 중간이 아펜젤러, 오른쪽이 김기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