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22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9월 엡웟청년회의 국권회복운동

나효선 2022. 9. 14. 06:51

기독교대한감리회 2022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9월 교인들이 도끼를 들다!

엡웟청년회의 국권회복운동

 

3단원 나라와 민족을 세우는 감리교회

 

찬송 : 580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성경봉독 : 에스겔 22:23~31, 디모데전서 1:1~5

요절 :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디모데전서 1:2)

 

 

 

조선시대의 궁궐이자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했던 장소, 덕수궁. 구한말 일제에 의한 강제침탈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수많은 예비 부부의 결혼사진촬영장소이자,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가 되었습니다. 덕수궁 내에 있던 중명전은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곳으로, 대한민국 역사의 아픈 현장입니다. 이곳이 오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1905년 덕수궁에서 벌어졌던 을사조약 이후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덕수궁 대한문 앞, 도끼를 둘러멘 청년들이 꿇어 앉아 통곡하며 소리쳤습니다. “전하! 대조선이 왜놈들의 보호를 받다니요, 천부당 만부당하옵니다.” “전하! 차라리 저희 목을 치소서!” 19051117일 밤, ‘을사보호조약’, ‘을사5조약으로 알려진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기는 조약이 체결되자 수많은 유생들이 대한문 앞에 모여 조약 취소를 호소하는 상소운동을 벌였는데 그 가운데 도끼를 손에 든 채 상동교회에서 몰려나온 청년회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의 도끼 상소운동을 주도한 상동교회 엡웟청년회원들이었습니다.

 

189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감리교회 청년단체로, 존 웨슬리의 출생지 이름을 따서 엡웟청년회라고 하였습니다. 교육과 선교, 친교,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순수 신앙단체였는데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사회, 정치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아주 강력한 반일 저항조직이 되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기 위해 조약을 체결하자며 압박을 했는데, 그 내용은 일본이 한국을 보호해 줄 테니 주권의 상징인 외교권을 이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90511월 일본의 압박은 더 거세졌고, 훗날 을사오적으로 불리는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 친일관료들의 압박도 거셌습니다. 결국 덕수궁을 에워싼 일본군에 포위된 채 고종황제는 중명전에서 한일협상조약이라 불리는 조약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 직후 장지연의 시일야 방성대곡(이 날, 목놓아 우노라!)”이라는 절규를 실은 황성신문은 폐간되었고, 내부대신, 학부대신, 외부대신, 참정대신을 역임하며 저항하다 시종무관장으로 밀려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약 반대상소를 올렸다가 감옥에 갇힌 민영환은 자결하였는데 그 자리에 피죽(血竹)이 돋아났습니다. 그러니 국민적인 저항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의병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전덕기 목사가 담임이었던 상동교회는 교회 안에 우리 문화와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공옥학교, 상동청년학원을 두어 이준, 이시영, 남궁억, 김구, 이승만 등 민족주의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상동교회에서는 을사조약 직후부터 구국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초교파적으로 모였던 구국기도회 관련 기사가 대한매일신보 19051119일자에 실렸는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시여 우리 한국이 죄악으로 침륜에 드럿스매 오직 하나님밧게 빌디업사와 우리가 일시에 기도하오니 한국을 불샹히 녁이사 예레미야와 이사야와 다니엘의 자기 나라를 위하야 간구함을 드르심갓치 한국을 구애하사 전국 인민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고 가 천국 백성이 되어 나라이 하나님의 영원한 보호를 밧아 지구상에 독립국이 확실케 하야 주심을 예수의 일홈으로 비압나이다라는 기도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회를 마치고 나서 최재학이 인도하는 1차 상소단이 도끼를 어깨에 메고 대한문으로 갔는데 이준이 초안한 상소문을 읽기도 전에 일본수비대에게 끌려갔고, 교회에 남아있던 청년들이 종로로 나가 항의시위를 벌였습니다. 청년시위대와 일본군 사이에 투석전이 벌어지고 주모자들이 체포되었으나 이 일로 교인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습니다. 상동교인 정순만은 평안도에서 힘이 센 장사들을 데려다가 교회 안에서 합숙을 하며 체력훈련을 시켰는데 이는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처단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한문 앞에서의 도끼상소, 그리고 요인암살계획까지 상황이 악화되자 당시 선교관리자였던 윌리엄 스크랜턴은 교인들이 과격해지는 것과 엡웟청년회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본래의 설립목적에서 상당히 벗어났다라는 이유로 엡웟청년회를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당시 국제적으로는 하와이에서 일본 수상 가츠라와 미국 국무장관 태프트가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묵인하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한다는 내용의 비밀각서를 교환하는 가츠라-태프 조약이 체결되고, 일본과 영국이 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면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일본이 한국 지배에 대한 암묵적 지지를 얻어내는 때였습니다.

 

 

도끼상소는 목숨을 걸고 왕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는 극단적인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상동교회 청년들이 이런 방법을 선택한 것은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절실함은 개인의 욕심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상동교회 엡웟청년회원들의 신앙고백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행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먼저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실천하는 용기 있고 담대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성찰을 위한 질문

 

1) 교회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말해보세요. 만약 지금 일제강점기와 같은 상황이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2) 목사가 길거리로 나가 구국기도회를 여는 모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일제강점기 우리 신앙 선배들의 구국기도회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22년 월례회 공과

 

자랑스러운 한국감리교회 열 두 가지 이야기

 

 

1896년 독립협회가 개최한 만민공동회의 애국상소운동

 

중명전

 

중명전 전시실의 을사늑약문

 

을사늑약 체결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