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서울연회 도봉지방연합회 계삭회 변화를 위한 충고 이민재 목사

나효선 2022. 10. 27. 20:15

 

 

2022년도 여선교회 도봉지방연합회 제4계삭회가 열렸습니다.

 

행동하는 신앙, 되살아나는 우리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야고보서 2:22)

 

일시 : 20221016() 오후 4

장소 : 은명교회 (이민재 목사)

 

 

1부 예배

 

 

인도자 : 전용우 장로(총회장)

 

 

 

 

기도 : 박수영 집사

 

 

성경봉독 : 전용우 장로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베드로후서 1:3-7)

 

 

특별 찬양 :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도봉지방연합찬양대

 

                   지휘 황은경 사모 (성흔교회)   반주 황은혜

 

 

 

 

 

 

 

말씀 : 이민재 목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

 

의식

 

의식의 수준은 크게 셋입니다. “합리적”(rational) 의식을 기준으로, 합리성 이전의 전이성적”(pre-rational) 의식과 그것을 초월하는 초이성적”(trans-rational) 의식이 그것이지요. 의식의 수준에 따라 신앙 양상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성찰하려면 의식의 수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의식이 전이성차원에 머물 때 신앙은 욕망의 지배를 받습니다. 욕망을 통제할 합리적 이성이나 욕망을 변형시킬 신성한 직관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번영신앙은 전이성 수준의 의식에서 비롯한 신앙 행태입니다. 이기적이며 세속적인 축복을 구하는 기복신앙이나 초자연적 힘의 개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적신앙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번영신앙의 동력은 성축부성”(성공축복부흥성장)을 향한 강렬한 욕망입니다. “번영신앙은 건강과 부를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교묘하게 신학적으로 포장한 것이며, 그 배후에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있다”(류장현)고 볼 수 있지요.

 

전이성 수준에서 신앙인은 주체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며 자율적으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이성이 발달하지 않고 직관이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초등교사(3:24-25)입니다. 이 수준에서 신앙인은 유아적인 상태에 고착되어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갇혀 있습니다.”(3:23) 율법(또는 교리)은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선과 악, 내 편과 네 편, 정통과 이단 따위의 흑백논리에 쉽게 빠집니다. 여기에서 자기중심성과 배타성이 나오지요. 자신과 다른 것(다른 신앙, 다른 교리)에 대한 독선과 혐오와 배제는 전이성 차원의 전형적인 신앙 행태입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니까요.

 

의식이 합리적차원에 이를 때 신앙은 욕망보다 이성의 영향을 받습니다. 신앙은 더 이상 욕망 성취의 수단이기를 멈춥니다. 이 수준에서 신앙인은 기복신앙과 기적 추구에서 벗어나 사랑정의평화생명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합니다. 합리적 의식 수준에서 진리는 전통과 권위를 통해 전달되는(deliver) 게 아니라 이성의 힘으로 발견하는(discover)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모든 주제(신론, 기독론 등)를 전통적인 신학이나 교리의 틀로 보지 않고 이성의 렌즈로 보려고 합니다.

 

합리적 의식 수준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하늘에서 떨어진 절대 무오(無誤)의 경전이 아닙니다. 종교적 권위가 승인한 무시간적인 계시도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삶의 문서일 뿐이지요. 그래서 성경을 이성의 조명을 받아 비판적으로 읽습니다. 신화적인 요소는 가능한 한 배제하려고 하며, 기적 이야기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합리적 수준의 신앙은 지나치게 머리 중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간파한 대로 지식은 교만에 이르게 하지요.(고전 8:1) 그래서 머리 중심의 신앙은 이념적논리적 우월성에 빠지기 쉽습니다. 율법적(교리적) 신앙이 배타성에 빠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의식이 초이성차원으로 상승할 때 신앙은 욕망의 수렁에서 벗어나고, 무서운 교사로 군림했던 율법(교리)의 굴레에서도 해방될 뿐 아니라, 머리 중심 신앙의 이념적 경직성에서도 벗어납니다. 욕망의 수렁과 율법의 굴레, 그리고 머리의 경직에서 벗어날 때 가슴이 열리고, 감수성이 살아납니다. 무엇보다 새로운 인식 능력이 싹틉니다. 그게 바로 직관이지요. 직관은 욕망의 수렁과 율법의 굴레와 머리의 경직에서 벗어날 때 깨어나는 통합적인 알아차림의 능력입니다. 비로소 영적 의식이 싹틉니다. 하나님 경험도 새로워지지요. 하나님은 저기 바깥에 존재하는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대상이기보다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신성한 현존입니다. 이런 하나님 경험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17:28)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10:30)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경험을 반영합니다. 초이성 단계의 의식 수준에서 신앙인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신비로 경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성한 현존에 둘러싸여 있음을 감지하기에 하나님을 더욱 가깝게 느낍니다. 질문자께서 언급하신 하나님과의 합일은 이 수준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신앙의 경지이지요.

 

직관이 깨어나면 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만유시며 만유 안에 계심”(3:11)을 담론이 아니라 리얼리티로 알아차립니다. 이때 만물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성사(聖事)가 됩니다. 새와 들꽃이 예수님께 하나님 현존의 통로가 된 것처럼 말이지요. 하나님과의 합일에 이르면 만물뿐 아니라 만인과도 하나임을 느낍니다. 하나님과 만물, 그리고 만인과 하나임을 깨달을수록 욕망은 비워지고, 상상은 정화되며, 생각과 감정은 신성에 조율됩니다. 번영신앙의 탐욕과 율법신앙의 배타성, 집단적 맹신의 광기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의식은 대양처럼 활짝 열려 낯선 것이나 다른 것들까지 받아들입니다.

 

 

변형

 

사도 바울은 변형신앙의 강력한 대변자였습니다. 그는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간곡하게 권고했지요.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입니다.(4:22-24)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르라고 말입니다.(3:14-15) 그가 바란 것은 우리의 비천한 몸이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는 것”(3: 21)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하기 위함”(벧후 1:3)이라고 하면서 변형신앙을 웅변적으로 증언합니다. 번영신앙처럼 무병장수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베드로는 대담한 발언을 서슴지 않습니다. 정욕 때문에 부패하지 말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벧후 1:4)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라니요! 하나님스러워지라는 말 아닌가요? 베드로는 선언만 하지 않고, 실현과정을 단계적으로 제시합니다.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 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 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입니다.(벧후 1:5-7)

 

감리교회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변형신앙의 훌륭한 계승자였습니다. 감리교회 구원론의 꽃인 그리스도인의 완전교리는 변형신앙의 탁월한 변주(變奏)였습니다. 죄인이 깨닫기 전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온 누리에 현존하며 그리스도 안에 충만합니다. (선행은총) 그러므로 생의 어느 시점에 선행은총을 깨닫는 순간 그리스도께 귀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회개) 이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믿음과 칭의)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닮게 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하나님을 닮고 싶습니다. (성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지극하고, 닮음이 점차 깊어지면 신자는 마침내 사랑으로 충만한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 웨슬리는 오늘날 우리가 되살려야 할 변형신앙의 거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웨슬리 영성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이정표를 갖고 있습니다. 웨슬리 영성의 뿌리는 예수님에게서 비롯한 변형신앙이니까요.

 

 

수행

 

변형신앙 담론을 내면화하고 현실화할 수행은 무엇일까요? 관상기도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통성기도처럼 욕망 충족을 위해 부르짖지 않습니다. 관상기도는 성축부성”(성공축복부흥성장)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깊은 침묵 속에서 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현존 속에 머무르는 기도지요. 그렇기에 관상기도를 꾸준히 하면 의식의 결이 바뀝니다. 초이성 수준의 신성한 영적 의식으로 말입니다. 관상기도 수행을 통해 영적 의식 수준에 다다를 때 수행자는 성화와 완전의 과정을 거쳐 시나브로 복음의 요구에 적합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때 예수의 길처럼 뜻깊고 즐거운 삶의 길도 없지요.

 

어느 가나안 신자의 질문에 답함 중에서

숨빛향기 post.naver.com/my.nhn?memberNo=41915488

 

 

변화를 위한 충고

이민재 목사 (은명교회)

 

남을 바꿔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나를 바꿔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환경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환경을 변화시키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세상이 변하는 기적을 바라지 말고

내가 변하는 신비를 구하십시오.

 

운명은 요술이나 요행이 아니라

존재 변형의 신비를 통해 새로워진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변하되 빨리 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제대로 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변화의 과정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라

평생 걸리는 일이라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만일 변화가 너무 더뎌 속이 타거든

아무도 모르게 산에 올라 가만히 나무를 안으십시오.

 

그리고 속으로 기도하십시오.

나무의 속도만큼만 자라게 해달라고.

 

그리고 나무와 함께 견디십시오.

생명 세계의 느림과 침묵과 기다림의 시간들을.

 

 

 

 

헌금 기도 : 강승연 권사

 

 

내빈소개 : 노미경 연합회장

 

 

 

축도 : 이민재 목사

 

 

 

 

2부 계삭회

 

사회 : 노미경 연합회장

 

 

 

 

회원 점명 및 전 회의록 낭독 : 박영순 서기

 

 

 

회장 활동 보고 : 노미경 회장

 

 

 

회계 보고 : 이영선 회계

 

 

각부 보고 : 재정, 선교, 교육, 사회사업, 연구, 청소녀지도, 문화 - 각부 부장

 

 

성경 쓰기 시상 : 이승신 교육부장

 

 

 

 

광고 : 김진희 총무

 

 

 

 

이희원 장로 (도봉지방회 사회평신도부 총무)

 

 

여선교회가 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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