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7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1과 그리스도의 참된 군사 토머스 웹

나효선 2017. 11. 28. 23:52

기독교대한감리회 2017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1과 그리스도의 참된 군사

토머스 웹 Thomas Webb

 

 

  

   

* 성경봉독 : 디모데후서 2:1~4

* 참고성경 : 디모데전서 6:11~12

* 요절 :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2:3)

    

토머스 웹은 자신이 십자군인이며 웨슬리의 영적인 후예라고 할 정도로 성실한 감리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그것보다 그리스도의 군사로 활동하는 것을 더 기뻐했고, 웨슬리의 영적인 후예로 행동하는 것을 더 좋아했던 진정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한쪽 시력을 잃었음에도 이에 개의치 않고 전도하며 감리교회가 미국에 뿌리를 내리는 데 헌신했습니다.

 

토머스 웹은 1724년 영국의 서쪽에 위치한 배스 혹은 샐리스베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757년에 원하던 대로 군인이 되었고 보병연대의 보급 장교가 되었습니다. 1년 뒤인 1758년, 토머스는 중위로 진급되었고, 같은 해에 자기 연대와 함께 북아메리카로 전출되었습니다.

 

1759년 여름에 웹은 육군의 계급에 대한 논문을 출판했는데, 그것은 전쟁학에 대한 이론이었습니다. 이 논문에서 웹은 신세계(미국)에서의 전쟁이 유럽에서의 전쟁과 어떻게 다른지, 또한 기동성을 필요로 하는 지형에서 왜 크지 않고 무겁지 않은 무기들이 필요한지를 지적했습니다. 그의 논문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조지 워싱턴의 복사본을 보스톤박물관에 보관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중대장에 추천되었지만 그는 거부했습니다. 웹은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아내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군인의 아내로 살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죽자 웹은 자신의 직을 넘겨주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갔습니다.

 

1764년 겨울, 웹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확신과 자신의 죄인 됨은 치유불가능하다는 인식 때문에 절망했고, 이내 침울함에 빠졌습니다. 그때 그는 한 모라비안 설교자에게 안내되었고, 그의 열정적인 주일 설교(1765년 3월 24일)가 40세 된 웹을 설득시켰습니다. 웹은 십자가에 달린 분이 자신의 죄와 수치를 담당해 주셨고, 그것들을 제거해 주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웹의 절망은 사라졌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웹은 나머지 삶을 영광 중에 주님을 볼 확신을 증거하며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웹은 곧 감리교인들에게서 영적인 고향을 발견했고, 그들과 자신이 서로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여길 정도로 감리교인들을 좋아했습니다.

 

베스에서 설교하기로 예정된 설교자가 나타나지 않은 어느 주일, 웹이 설교 요청을 받았습니다. 설교하는 기법을 전혀 모르고 공식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웹은 무의식적으로 단지 자기의 회심에 대해 꾸밈없이 말했습니다. 성령에 이끌림 받은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퇴역 군인의 이야기는 얼어붙은 사람들의 가슴들을 녹였고 그의 소명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1766년 퇴역한 웹은 한 명의 시민으로서 뉴욕으로 돌아갔습니다. 군사학에 대한 책으로 군과 무기를 재배치하게 만들었던 웹은 이제 산만하게 흩어진 사람과 초기 미국 감리회의 자원들을 결합하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공적인 철저함은 자신의 각성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뜻”(행 20:27)을 재해석하게 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웨슬리의 강조점, 즉 기독교인의 완전 사상을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인내심이 강했던 웹에게 6개월간의 집중적인 복음사역은 불평이 아니라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백인과 흑인이 반반인 24명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감리교의 편에 서서 지칠 줄 모르고 사역했던 웹은 사도 바울처럼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뉴저지, 델라웨어, 메릴랜드, 그리도 펜실베이니아의 여러 지역에서 사역하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필라델피아에서는 휫필드의 불에서 점화된 복음적 불꽃을 더욱 활활 타오르게 했습니다.

 

1772년 8월 웹은 영국 리즈에서 열린 감리교 회의에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웹의 경영능력을 간파한 존 웨슬리 목사님은 리머릭과 듀블린 감리교 신도회에서의 오래된 어려움들을 해결하도록 그를 아일랜드로 파송했습니다. 1773년 4월 웹은 아내 그레이스와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미국 스파이인 사무엘 퍼비안스가 그를 영국군 스파이로 고발했습니다. 웹은 이때 일반 시민이었지만 군대의 펜션을 계속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웹은 체포되어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전쟁포로 캠프에 갇혔는데, 거기에서도 갇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1776년 다시 영국에 온 웹은 영국에서도 쉬지 않고 감리교를 위해 격려하고 설교하였습니다. 또한 급증하는 군중들을 수용할 예배당 건립을 위한 기금 모금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포틀랜드 하이츠에 위치한 브리스톨의 제2의 예배당 건립을 위한 기금 모금에 두드러지게 활약했습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복음 사역에 힘쓰던 웹은 1796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웹이 서거 후, 교회는 그의 유품을 포틀랜드 하이츠에 묻었습니다. 175년 뒤인 1972년, 포틀랜드채플이 문을 닫게 되면서 웹의 유품이 발굴되었는데, 그의 녹색 헝겊이 거의 손상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아내의 유품과 웹의 유품은 브리스톨의 새 룸에 다시 묻혔습니다.

 

웹은 공식적인 교육의 부재와 사회적인 세련됨의 부족에도 그것을 채우고도 남는 한결같음을 지녔고, 항상 사도를 생각나게 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존 웨슬리 목사님은 웹의 굴곡 없는

불굴의 의지에 감사했습니다. 찰스 웨슬리 역시 존 웨슬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웹이 비록 분명하고 좋은 설교자는 아니었지만 활기와 열정이 넘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봅시다.

 

2.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7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웨슬리의 후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