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7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9과 교회의 여성 참여 선구자 프랜시스 윌러드

나효선 2017. 9. 28. 16:45

기독교대한감리회 2017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9과 교회의 여성 참여 선구자

프랜시스 윌러드 Frances Willard

  

  

 

 

  

* 성경봉독 : 시편 100:1~5

* 참고성경 : 사도행전 16:11~15

* 요절 :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프랜시스 엘리자베스 캐롤라인 윌러드(Frances Elizabeth Caroline Willard)는 감리교인인 부모 밑에서 성장했으며, 교회의 여성 참여를 강력하게 주장한 여성 감리교인입니다. 그녀는 1888년 락리버연회에서 총회 평신도 대표로 선출되었지만, 총회에 의해 대표직이 거부되었습니다. 이때 부터 안나 올리버(Anna Oliver)와 함께 감리교회 여성들의 참여를 위한 투쟁을 시작했고, 마침내 그것을 얻어냈습니다. 이 외에도 윌러드는 미국의 절제운동의 리더이고, 개혁가이고, 유명한 강연자이자 작가이며, 교육가였으며, 18세기와 19세기를 거치면서 미국 헌법을 수정하는 데까지 영향력이 미쳤습니다.


 

프랜시스 윌러드는 1839년 조시아 플린트 윌라드와 메리 톰슨 힐 윌러드의 딸로 뉴욕 로체스터 근처의 처치빌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농부이자 입법부의 일원이었고,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1841년에 윌라드 가족은 오하이오 오벌린으로 이주했습니다. 아버지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오벌린대학에서 공부했는데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 1846년 위스콘신의 제인스빌로 옮겼고, 회중교회에서 감리교도가 되었습니다. 이때 윌라드와 그녀의 여동생 메리는 이모가 가르치고 있던 밀워키 노말학원에서 공부했습니다.

 

1858년에 윌러드 가족은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으로 이주했고 아버지는 은행원이 되었습니다. 윌러드와 여동생은 노스웨스턴여자대학을 다녔고, 오빠 올리버는 게렛 성서학원에 다녔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윌라드는 미국 전역에서 여성들의 권리에 대한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그녀는 1871년 새롭게 설립한 여성을 위한 에반스톤대학의 총장이 되었습니다. 에반스톤여자대학이 1873년 노스웨스턴대학교에 소속되어 여성대학부가 되었을 때, 여성대학부의 첫 여성 학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여성대학부 관리를 하면서 총장인 찰스 헨리 파울러와 대립하여 1년 만에 사임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윌러드는 새로운 일, 즉 여성들의 절제운동에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1874년 기독교여성절제연합(Women’s Christian Temperanjce Union WCTU) 설립에 참여했고, 1876년에는 출판부 수장이 되어서 주간신문 발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1879년 미국 WCTU의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죽을 때까지 그 직을 유지했습니다.

    

윌러드는 유명한 강연자였습니다. 1874년에는 50일 연속 순회연설을 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습니다. 10년 동안 개인 비서 안나 아담스고돈의 도움을 받으며 연 평균 3만마일, 400번의 강의를 했습니다.

 

여성 참정권확대를 위한 윌러드의 요점은 ‘가정보호’에 기초했습니다. 그녀는 가정보호를 ‘운동’으로 묘사하면서, 목적은 “황폐화로부터 가정들을 지키는 한 수단으로 21세 이상의 모든 여성들의 투표를 보장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황폐화’는 마약에 취한 남자들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을 의미했습니다. 윌러드는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없다면 남자들이 너무 쉽게 범죄를 교묘히 피하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윌러드는 여성들이 자신을 성적인 ‘약자’라고 생각하며 남성들에게 의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의식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치는 여성들을 위한 장이라는 의식을 갖고, 사회 증진을 위한 운동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윌러드의 참정권 확대 주장은 성서해석에 의거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평등하게 창조했음을 강조하면서, 자연적이며 신적인 법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리더십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미국 가정의 동등성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녀는 가정의 이런 개념을 확장시켜서, 남성과 여성이 교육과 교회와 정부의 모든 면에서 함께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신적인 법체계 전반에 나란히 위치”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윌러드의 사역은 1883년 국제적인 영역으로 확대되어서 다국어로 된 마약 상행위를 반대하는 청원서를 배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녀는 또한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 여성협의회에서 매이 라이트와 함께 일했습니다. 그녀는 1888년 항구적인 기관이 된 미 국가여성협의회의 회장이 되어 1890년까지 그 직을 수행했고, 또한 1888년 세계기독교여성절제연합의 회장으로 1893년까지 봉사했습니다.

 

윌러드가 이렇게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한 계기는 교회에서의 여성 차별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남녀평등이 교회 안에서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회에서는 오죽하겠는가라는 생각에서 남녀평등 사상 전파에 일생을 바친 것입니다. 따라서 그녀의 사상은 철저히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지만 여전히 불평등의 요인이 교회와 사회에 남아 있음을 안타까워했던 그녀는 1898년 영국과 프랑스로 가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걸린 독감으로, 뉴욕의 엠파이어 호텔에서 잠자듯이 조용히 서거했습니다.

 

윌러드는 죽은 뒤에도 헌신의 자세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에반스톤 집을 WCTU에 유산으로 넘겨주었습니다. 프랜시스 윌러드의 집은 1900년에 박물관으로 오픈되었습니다. 1905년 헬렌 팜스워스 미어스에가 디자인한 윌러드의 동상이 미 국회의사당의 국가 조상 홀에 세워졌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현재 우리교회와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2.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누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7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웨슬리의 후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