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7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2과 미국 감리교회의 선구자
프랜시스 애즈베리 Francis Asbury
* 성경봉독 : 고린도전서 4:1~2
* 참고성경 : 이사야 55:1~6
* 요절 :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22세인 이른 나이에 존 웨슬리에게 발탁되어 순회 설교자로 임명받은 탁월한 감리교회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평신도 설교자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감리교회가 미국에 뿌리내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초대 감독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역할은 웨슬리의 복음전도에 대한 사명과 열정을 본받았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1745년 8월, 영국 스타포드셔의 함스테드 브리지에서 엘리자벳과 조셉 애즈베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8세에 감리회 집회를 위한 지역 평신도 설교자가 되었고, 22세에 존 웨슬리에 의해 순회설교자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로부터 11개월 동안 애즈베리는 스타포드셔를 순회하면서 설교와 교육에 힘썼습니다. 그 순회는 서 브롬위치, 웬즈베리, 월솔, 월버햄튼, 그리고 빌룩의 작은 웨슬리 신도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지역들은 영국 버밍햄의 서쪽에 있는 블랙 칸트리의 감리교 근거지였습니다.
1766년 1월, 애즈베리는 자신의 멘토였던 마더에게 갔습니다. 그는 애즈베리에게 웨슬리운동에 풀타임으로 참여하기를 권했고, 애즈베리는 망설임 없이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독서의 필요성을 깨닫고 웨슬리가 설교자들의 교육을 위해 권면한 책들을 하루에 5시간씩 읽었습니다. 또한 웨슬리의 권유에 따라 몇 권의 신학 서적들, 성서, 자연철학, 천문학, 역사학, 시, 그리고 라틴 문학 등을 읽었습니다.
애즈베리가 본격적으로 영국순회를 시작할 때 브리스톨에 있는 킹스우드 웨슬리학교의 히브리어 선생인 윌리엄 오페와 짝을 이루었습니다. 애즈베리와 오페는 스타포드셔를 순회했습니다. 애즈베리는 블랙 컨트리를 중심으로 하는 버밍햄의 서쪽 지역을 맡았고, 오페는 워시스터와 글로우시스터를 중심으로 하는 버밍햄의 동쪽지역을 맡아 최선을 다해 헌신했습니다.
1767년 감리교 런던회의에서 웨슬리는 앞서 자신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한 애즈베리에게 베드포드셔 순회설교를 맡겼습니다. 애즈베리는 여기서도 헌신적으로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감리교로 이끌었습니다. 웨슬리는 순회설교를 성공적으로 마친 애즈베리에게 런던으로 돌아와서 다음 임무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런던에 온 애즈베리는 장차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좋은 파트너가 될 젊은 사역자인 벤자민 러쉬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미국에서 함께 감리교회를 세우는 데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1771년 8월, 웨슬리는 미국에서의 사역을 자원하는 애즈베리를 미국으로 파송했습니다.
1771년 미국에 온 애즈베리는 처음 17일간 필라델피아와 뉴욕에서 설교했고, 그 해에 25개의 정착촌에서 설교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감리교로 이끌었습니다. 1776년 미국에 혁명전쟁이 일어나 위험에 처하게 되자 모든 감리교 선교사들은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애즈베리는 제임스 뎀스터와 함께 미국에 그대로 남아 선교를 계속했습니다.
1784년 존 웨슬리는 애즈베리와 토머스 콕을 미국 사역을 위한 감리사로 임명했습니다. 그해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때 개최된 회의에서 미국 감리교를 감리교 에피스코팔 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라고 명명했습니다. 또한 이 회의에서 애즈베리는 목사안수를 받았고, 향후 32년 동안 애즈베리는 미국의 모든 감리교도들을 이끌었습니다.
웨슬리처럼 에즈베리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설교했습니다. 법원청사, 공공건물, 담배 재배지, 밭, 공공광장 등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서나 설교했습니다. 애즈베리는 매년 평균 6,000마일을 말을 타고 다니면서 매일 설교했고, 회의와 콘퍼런스를 주재했습니다. 그가 미국 감리교회를 치리하는 동안 교인수가 1,200명에서 214,000명으로 증가했고, 700명의 목회자가 생겼습니다. 그가 목사안수한 사람들 중에는 미국 최초의 흑인 목회자인 리처드 알렌도 있었습니다.
1813년 애즈베리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지금은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성장을 이룬 시기이다.” 미국교회 역사에서 가장 활발한 시기에 애즈베리는 탁월한 설교자로 평가받았습니다.
전기 작가인 에즈라 스퀴에르 티플은 애즈베리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의 공인된 메신저로서의 권위를 갖고 말한다면; 하늘의 보증을 담지한 인증서를 갖고 있다면; 그가 나팔을 불기 위해 들어 올릴 때, 전능자가 한 번 강력하게 분다면; 하나님의 현존, 부르시는 하나님의 현존, 기름 부으시는 하나님의 현존, 심판자 하나님의 현존, 그리고 청중들을 떨게 만드시는 말씀을 주시고, 그들을 공포로 녹이시는 말씀을 주시며, 그들을 죽은 자처럼 쓰러뜨리는 말씀을 주시는 분의 현존을 의식한다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는 사람에게 위대한 설교자란 타이틀을 붙인다면; 그렇다면 애즈베리는 위대한 설교자이다.”
이렇게 위대한 설교자였고, 감리교회가 미국에 뿌리내리는 데 헌신한 애즈베리 감독은 버지니아 주 스폿사일배니아 카운티에서 1816년 조용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가 소천하자 교회는 시신을 존 에모리 감독의 무덤이 있는 볼티모어 주 올리벳 산 공동묘지에 안치했습니다.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웨슬리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설교자였습니다. 특히 그는 미국 감리교회 감독으로 감리교회를 미국에 뿌리내리고 세우기 위해 헌신한 탁월한 웨슬리의 후예였습니다. 미국의 감리교회의 성장에는 애즈베리의 헌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감리교회는 애즈베리신학대학을 세워 그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지금도 미국 감리교회에 영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오늘 감리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 지 생각해 봅시다.
2. 우리가 속한 교회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지 나누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7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웨슬리의 후예
'기독교대한감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7년 세계기도일 예배 노원 · 도봉지역 / 한국교회여성연합회 (0) | 2017.03.09 |
---|---|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도봉지방회(2017년) (0) | 2017.03.06 |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도봉지방 임원세미나(2017년) (0) | 2017.01.21 |
기독교대한감리회 2017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과 감리교 선교의 아버지 토머스 콕 (0) | 2017.01.14 |
기독교대한감리회 2016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2과 한국 교회음악의 개척자 이유선 장로 (0) | 2016.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