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7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과 감리교 선교의 아버지
토머스 콕 Thomas Coke
* 성경봉독 : 디모데후서 4:2
* 참고성경 : 마태복음 28:18~20
* 요절 :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딤후 4:2)
한국 감리교회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30년, 그동안 한국 감리교회는 세상에서 희망의 등불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교회는 침체의 늪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교회는 신뢰를 회복해야 하는 역사적인 지점에 놓여 있습니다.
2017년 <평신도 월례회공과>는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6.17.~1791.3.2.) 후예들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삶과 사상을 통해 감리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가늠해 볼 것입니다. 첫 번째 인물인 토머스 콕은 감리교 선교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초창기 감리교회의 발전에 많은 공을 세운 분입니다.
토머스 콕은 1747년 웨일스 남쪽 브레콘의 약제상 아버지를 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콕은 웨일스 전통이 강한 옥스퍼드의 지저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1770년에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772년 고향 브레콘으로 돌아와 1775년에는 시민법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브레콘으로 돌아온 그 해에 콕은 영국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서머셋에 있는 남페터톤교회의 부목사로 부임했습니다. 콕은 당시 영국교회의 골칫거리로 떠오르기 시작한 웨슬리의 메도디스트 운동과 동맹을 맺고, 웨슬리에 의해 촉발된 전도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담임 목회자가 이를 문제 삼았고 결국 콕은 1777년 부활주일에 해임되었습니다. 교구 교인들은 벨을 울리고, 큰 통의 사과술을 개봉하여 마시면서까지 해임을 환영했습니다. 콕은 할 수 없이 1777년에 브레콘으로 되돌아왔는데,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2천명 앞에서 설교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콕이 존 웨슬리와 만난 1776년, 그는 웨슬리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콕을 “벼룩”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항상 자기 사명을 위해서 벼룩처럼 뛰어다녔기 때문입니다.
콕은 1780년 런던지방의 감리사로 임명받았고, 1782년에는 아일랜드 감리교회 회장으로 임명받았습니다. 1784년 1월에는 영국의 욕(York)지방 출신의 유능한 설교가이자, 변호사였던 토머스 파커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이방 선교를 위한 연합회’ 설립에도 동참했습니다.
미국의 13개 식민지가 영국의 지배에서 분리해서 독립한 미국 혁명 후, 미국에 있던 대부분의 영국 성직자들은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웨슬리는 런던교구의 감독에게 신세계인 미국을 위해 몇 몇 사역자들에게 목사안수를 주자고 제안했지만 감독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 때까지도 웨슬리는 안수례 집전은 교회법적으로 성별된 감독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784년 9월 브리스톨에서 웨슬리는 콕을 감리사로 성별해서 세웠습니다.
1784년, 감리사로서 미국 감리교회의 치리를 위해 콕은 웨슬리의 파송을 받아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가 미국에 온 해인 1784년 성탄절에 감리교 설교자들의 회의가 볼티모어에서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서 콕과 프랜시스 애즈베리가 감리사로 선출되었고, 교회는 ‘감리교 에피스코팔 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라는 이름의 독립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콕과 애즈베리는 미국 감리교회의 첫 공동 감리사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감리사는 희랍어로 ‘에피스코포스’로 감독도 어원상 에피스코포스와 같은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래서였는지 메도디스트가 독립교회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웨슬리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787년 미국 감리교회는 콕을 감독으로 세웠습니다. 미국 감리교회는 콕이 이미 영국교회의 사제였기 때문에 웨슬리가 콕을 감리사로 세운 것을 감독으로 세운 것과 같다고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콕은 1785년에 영국으로 돌아와 수 개 월간 영국 전체를 여행하면서 선교했습니다. 그리고 1786년에는 처음으로 서인도제도에 가서 선교했습니다. 사실 그는 서인도제도가 아니라 캐나다의 노바 스코티아에 선교부를 설립할 목적으로 배를 탔습니다. 하지만 가는 도중 강풍으로 인해 영국 영인 서인도제도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콕은 거기에서 영국 식민지들에서의 선교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거기 주민들이 너무 순박하고,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콕은 남은 생애를 선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했고 전 재산을 선교에 바쳤습니다. 그 후 콕은 1788년, 1789년, 1790년 등 세 번이나 서인도제도를 방문해서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면서 전도했다”고 고백할 정도로 선교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더욱이 1791년 웨슬리가 서거한 후, 콕은 웨슬리가 바랐던 후계자라는 평을 받으면서 영국 감리교회의 실무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1808년까지 전 세계를 교구삼아 감리교선교에 매진했습니다. 콕은 1791년 프랑스를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1792년부터 1793년까지 서인도제도를 방문하여 선교했습니다. 1803년에는 에스파니아의 지브롤터에 감리교선교본부를 세웠으며, 아프리카 시에라리온까지 가서 복음 증거에 힘썼습니다. 특히 1792년부터는 시에라리온, 노바 스코티아, 아일랜드, 프랑스, 그리고 서인도제도에 속한 대부분의 섬들에까지 개척 선교사들을 파송했습니다. 또한 콕은 캐나다와 스코틀랜드에도 감리교 선교본부를 세우도록 촉구했습니다.
1813년 콕은 동인도에도 감리교 선교본부를 세우기 위해 12월 30일 자비량으로 세일론(스리랑카)을 향해 떠났습니다. 콕은 영국 수상을 설득해 자신이 인도 감독이 되어 선교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를 타고 가는 도중 인도양 한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콕은 죽으면서도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선교사역을 감당했는데, 이것은 영국 감리교회가 콕이 세운 비전에 따라 세계선교에 앞장섰다는 사실이 잘 말해 줍니다. 프랜시스 애즈베리 감독은 콕을 “신사이며, 학자이고, 우리의 감독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자로서 열정에 있어서나 일에 있어서나 봉사에 있어서나 지난 세기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추모했습니다.
토머스 콕은 감리교 선교의 아버지로 부를 만큼 영국과 미국은 물론 인도에까지 감리교 선교를 위해 헌신한 웨슬리의 후예입니다. 토머스 콕의 활약으로 초창기 감리교회는 영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크게 발전했고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선교에 대한 열정과 활동은 오늘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되고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2017년 감리교회 성장을 위해 우리에게 어떤 사명이 주어져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7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웨슬리의 후예
집필자
최승태 목사
감리교 신학대학교 졸업
미국 클레어몬트 대학원 졸업
남부연회 대전둔산지방 천성교회 부목사
서인도제도
사진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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