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6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1과 교육가 신봉조 장로

나효선 2016. 11. 26. 16:40

기독교대한감리회 2016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1과 교육

신봉조 장로

 

* 성경봉독 : 마태복음 28:16~20

* 참고성경 : 열왕기상 19:19~21

* 요절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서론

11월의 인물은 신봉조 장로입니다. 그는 정동제일교회를 위해 평생 헌신한 장로로 신앙실천을 강조하였고, 자신도 그렇게 사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교사의 길을 천직으로 알아 일제의 위기 상황에서도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이화고등여학교라는 감리교 선교학교에서 한눈팔지 않고 외길로 정진하였습니다.

신봉조 장로는 특히 여성을 위한 교육에 헌신하였습니다. 여자야학에 참여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화고등여학교에서 그의 이념과 사상을 실천하였고 결국에는 풍성한 결실을 맺었습니다.

 

 

본론

신봉조 장로는 1900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습니다. 탄광업을 하던 부친이 일찍 별세하여 가난하게 살았고 겨우 보통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수 없어서 우편국에서 일하면서 상급학교 진학을 준비하였고, 이때 모은 돈으로 1915년 배재학당(후에 배재고등보통학교로 변경)에 입학하였습니다.

 

재학 중에는 학업에 정진하는 한편 배재학생기독교청년회에 가입하여 성경교사로 활동하던 김진호 전도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민족의식과 신앙을 키워갔습니다. 그는 부회장 등으로 역할하면서 종교 활동에 앞장섰고, 3·1운동 때에는 만세시위에 적극 나섰습니다. 특히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 집회와 3월 5일 학생들의 서울 시내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이 일로 체포되어 9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1920년에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에 베커 선교사의 집에서 장작을 패고 스토브에 불을 피우는 등의 노동을 하면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형편에서도 남을 돕고 민족을 계몽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1921년에는 차미리사가 종교교회에 설립한 여자야학에 가서 선생 노릇, 소사 노릇 등을 하며 큰 도움을 주었고, 여름에는 전국을 돌며 ‘여자 교육의 급선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여 여성계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1924년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에는 배재고보의 역사 교사로 부임하여 본격적으로 직업교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강압적인 교육방법을 최상으로 여기던 당시에 매를 들지 않는 교사로 유명하였고, “정의를 위해서는 백 번 꺾어도 굽히지 말 것이며 최후의 일순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며 민족정신과 애교심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927년에는 배재 교비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도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다시 배재고등보통학교로 돌아가 훈육 및 교무주임으로 근무하였습니다.

 

신봉조는 1938년 12월 감리교 선교학교인 이화고등여학교에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 되었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교육통제가 시작되면서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교장직과 학교운영권에서 선교사들을 배제하도록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처지(M. E. Church) 교장은 일제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고, 신봉조가 교장을 이어받게 된 것입니다. 최악의 시기에 교장의 직책을 맡은 그는 오로지 ‘생명을 부지한다’는 일념으로 일제가 강요하는 치욕을 견뎌내었고,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1944년 4월 감리교 선교부를 대신하는 자구책으로 새 재단법인 ‘유하학원’(해방 후 ‘이화학원’으로 명칭 변경)을 설립하여 학교를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학교 부지를 매입하고,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의 양적·질적 향상에 노력을 기울여 이화가 국내 최고의 여자 중등교육기관으로 확충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는 1961년 9월 정년퇴임하기까지 20여 년 동안 이화를 위해 헌신하면서, 이화를 빛내고 나라에 공헌하는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시켰습니다. 신봉조 장로는 이화 교장으로 활동하면서 “이화 발전을 위한 큰 공로자일 뿐 아니라, 진실한 교육가이시며, 사랑 많으신 아버님이시며, 충성된 신앙인”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이화 역사 100년 만에 처음으로 목사가 된 오혜식은 그를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신봉조 선생님은 존경받는 교육자이셨습니다. 아침 조회 때마다 우리들에게 들려주신 그 귀한 말씀들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직도 저의 귀에 메아리처럼 쟁쟁하게 울리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화동산에는 많은 길들이 있습니다. 큰 길, 좁은 길, 언덕길, 오솔길, 하얀 길, 굽어진 길, 내리막길, 평평한 길들이 있습니다. 인생에도 이러한 여러 모습의 길들이 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생명의 길로, 진리의 길로 가게 됩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신봉조 교장선생님은 진실된 분이셨고, 성경 말씀대로 사는 길만이 참된 길이요, 생명의 길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편 신봉조 장로는 1945년 이화가 낳은 애국자 유관순의 행적을 밝혀서 오늘의 유관순으로 부활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박인덕에게 “이화 출신 중에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 것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이에 박인덕은 3·1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을 소개하였고, 이후 유관순에 대한 사실이 사회에 알려지면서 1947년 8월 <유관순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이 사업회를 통해 유관순 사업이 본격화되어 영화와 전기를 만들고 그 활동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퇴임 후 학교법인 이화학원 이사장과 명예이사장, 서울예술학원 명예이사장, 상명학원 감사 이사 이사장, 그 외 학교법인 한양학원 영훈학원 연세대학교 재헌학원 새빛학원 인덕학원 배재학당의 이사 또는 부이사장으로 사학육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서울 학도체육지도위원 공로표창, 서울음악제전 양악80주년음악공로상, 국민교육헌장 이념구현공로상(대통령), 서울시문화상(교육부문), 제1회 사학육성 공로표창, 국민훈장 모란장, 한국로타리클럽 개척자상, 5·16민족상 교육부문 본상, 한국여성단체 공로상, 사학육성 공로상(봉황장)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1992년 12월 27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결론

신봉조 장로는 배재학당을 통해 삶을 변화시킨 인물입니다. 배재학당의 기독학생청년회를 통해 기독교신앙을 갖게 되었고, 민족의식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배운 것을 다시 되돌리는 교사의 길을 평생 걸었습니다. 그는 배재고등보통학교의 교사, 이화고등여학교 교장, 이화학원·이화예술학원 명예이사장으로 역할하면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신봉조 장로는 특히 이 땅의 여성들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여성교육과 예술교육의 밀알을 틔워 풍요한 열매를 거둔 교육자가 되었습니다. 위기 상황의 이화를 한국 최고의 명문사학으로 발전시켰고, 빈손으로 넘겨받은 이화재단을 한국에서 가장 튼실한 재단으로 가꾸어 놓았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만이 참된 길이요, 생명의 길임을 몸소 실천하며 얻은 결과였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신앙과 교육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2.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성장하도록 도울 것은 무엇일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6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