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6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0과 교회여성운동가
홍에스더 장로
* 성경봉독 : 누가복음 7:36~50
* 참고성경 : 에스더 4:13~17
* 요절 :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눅 7:50)
서론
이달의 인물은 홍에스더 장로입니다. 여성교육과 선교사업에 관련한 그의 활동은 교회는 물론 더 나아가 감리교와 한국 교회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었습니다.
홍에스더 장로는 감리교 여선교회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미 감리회 시절에 여선교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고, 남북 감리회가 하나 되어 조선기독교감리회가 창립된 이후에는 합동된 여선교회의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여 여선교회 발전의 산파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기 감리교 여선교회를 지도하고 이끌었고, 해방 후 재건된 여선교회에서도 회장으로 일함으로써 오늘의 여선교회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본론
홍에스더 장로는 1892년 서울 새문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홍정후는 선교 초기 새문안교회와 연동교회에서 선교사들과 활동한 장로교의 지도급 인물이었고,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홍에스더는 아버지가 1899년 33세의 나이에 사고로 별세하자 고향인 남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외조모 밑에서 성장하면서 신학문을 접하였습니다.
그 후 서울의 이화학당에 진학하여 1912년에 졸업하고, 이화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정동제일교회 교인이 되었습니다. 1917년 이화학당 대학부에 진학하여 1922년 졸업하였습니다. 대학 재학 중에는 만주 무관학교를 지원할 목적으로 여성들이 중심이 된 동지회를 결성하고 이를 지도하였고, 1920년 6월에는 정동제일교회 교인이면서 이화학당 교사나 학생인 7명으로 ‘이화 7인 전도대’를 조직해서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계몽강연을 열었습니다.
그는 ‘절제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절제운동은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신을 훼손하기 위해 퍼트렸던 퇴폐 향락 사치문화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운동으로 여성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정신적인 신앙운동에서 더 나아가 한국을 살리기 위한 민족운동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1923년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으로 선임되어 금주, 단연, 공창 폐지, 물감들인 옷 입기 등을 실천했으며, 1961년에도 회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22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1923년 미 감리회 여선교사 채핀(A. B. Chaffin)과 월터(A. J. Walter)의 후원을 얻어 미국 테네시 주 스카렛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여 1926년에 졸업하였습니다.
홍에스더는 1926년 귀국하여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취임하는 한편 1927년에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회장으로 교육과 여성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1927년 4월 <신간회>의 자매기구 형태로 만든 여성 민족운동단체인 <근우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5월에 열린 창립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근우회>는 1927년 5월, 3·1운동 후 일제의 민족운동세력 분열정책이 기승을 부리던 때에 청년 학생 종교인 노동자 지식인 계층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념으로 <신간회>가 조직되자 이에 맞물려 여성계에서 결성한 민족운동단체였습니다. <근우회>는 “① 조선 여자의 견고한 단결, ② 조선 여자의 지위 향상 도모”라는 강령에 따라, 억압과 착취가 일반화된 식민지 봉건 사회에서 여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계몽, 교육활동과 구체적인 생활 개선 운동 등의 적극적 여성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1930년 12월 하나 된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 때에는 미 감리회 평신도 총대의 자격으로 참석하여 새로 시작하는 조선감리교와 함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총회에서 감리교 총리원 이사와 교육국·중앙협의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감리교신학교 이사(1937년), 대한YWCA연합회 회장(1927~1932년, 1940~1941년)과 부회장·연합위원·총무(1934~1936년)를 역임하였습니다.
홍에스더 장로는 여선교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큰 공헌을 남긴 감리교 여선교회의 상징입니다. 1928~29년에는 미 감리회 여선교회 회장이었으며, 제1회 ‘기독교조선감리회 여선교회’ 대회(1931년 6월)에서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1941년 여선교회가 해산당하고 ‘부인회’로 이름이 바뀔 때에도 그 직임을 감당하는 영욕을 짊어졌습니다.
해방 후에는 단절된 여선교회의 역사를 잇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1947년 여선교회 대회에서 다시 회장으로 선임되어 먼저 복흥측 여선교회를 재건하였고, 1948년 4월 대회에서부터 본격적인 여선교회 사업을 재개하였습니다. 이 대회에서 홍에스더 장로는 끊어졌던 여선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잇는 막대한 임무를 부여받자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우리 각자가 깊이 회개하고 힘써야 할 것은 땅끝까지 전도하는 것입니다.”라고 일제말기 친일행각에 동원되었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1949년 5월에는 총리원에 신설된 ‘부녀국’ 초대총무로, 1953년에는 여선교회 총무로 선출되었습니다. 또한 한국 감리교 여선교회가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의 정식회원이 된 1956년에는 미국 레이크 주 날루스카에서 열린 세계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 감리교 여선교회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1961년 이화여자대학교 동창회에서 40년 교회 및 사회봉사 근속 표창을 받았고, 1973년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에서 표창을 받았습니다. 1975년 서울 자택에서 별세하였으며 1978년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결론
홍에스더 장로는 대단한 활동력을 보인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교회뿐 아니라 감리교와 한국 교회, 한국 사회에서 다양하게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전도활동, 교육활동, 여권운동, 여선교회 활동 등에서 여러 단체를 지도하고 이끄는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홍에스더 장로가 일생 중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지속적으로 관계한 것은 여선교회 활동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감리교 여선교회 창립 때 초대회장으로 선임되는 영예를 받았고, 또 일제의 강요로 여선교회가 해산당하고 친일적인 부인회로 바뀔 때에도 그 직임을 계속 감당하여 치욕을 짊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를 묵묵히 감당하였고 해방 후 새로운 여선교회를 재건할 수 있었기에 한국 감리교 여선교회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여성 교인들이 교회에서 그 지위를 보장받고 있습니까?
2. 남선교회와 여선교회가 한 주제를 놓고 함께하는 토론하는 모임을 가져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6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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