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6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8과 통일애국지사
신창균 장로
* 성경봉독 : 에베소서 2:14~18
* 참고성경 : 에스겔 37:15~23
* 요절 :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서론
8월의 인물은 신창균 장로입니다. 그는 조국의 통일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인물입니다. 어려서 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받아 나라를 위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나라를 위한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이러한 활동으로 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신창균 장로는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이로 인해 교사직을 사임하고 중국으로 망명해야 하는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통일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 일에 온몸을 바쳤습니다. 이 일로 사업체를 빼앗겨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혀 육체적 고통도 당했지만 통일운동에 헌신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본론
신창균 장로는 1908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습니다. 7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대전에서 기독교 선교 활동을 하던 종조부의 영향으로 누구보다도 민족의식이 투철했습니다. 그가 구체적인 항일운동에 나선 것은 3·1운동 때였습니다. 그는 친구들과 마을을 돌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동네 사람들까지 참여하는 만세 시위로 커졌습니다. 주동자였던 그는 체포되었으나 12세의 연소자라는 이유로 채찍만 맞고 석방되었습니다. 이때 자신 때문에 만세시위에 합세하여 구속되고 고문당한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 가시지 않았고, 그 미안함이 이후 그가 올곧은 삶을 살도록 이끈 원천이 되었습니다.
1921년에는 대전으로 나와 학교를 다니면서 대전제일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소년회장, 엡웟청년회의 총무와 회장, 교회학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조종범 이명제 목사와 이길용(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동아일보 기자) 등 교회 지도자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이 고양되어 대전보통학교의 항일 동맹휴학을 주동하였습니다. 이후 영동보통학교 고등과를 거쳐 청주사범학교를 졸업(1930년)하고 청남보통학교에 부임하는 것으로 교직의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러나 그의 활동과 사상에 대한 일경의 감시가 가중되어 194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마카오에 거주하면서 임시정부 연락책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성냥공장과 전력회사를 운영하면서 수집한 일본의 군사동향과 경제동향을 임시정부에 보고하고 자금도 보냈습니다,
신창균은 1945년 4월 귀국하면서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장로로서 침체에 빠진 교회를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특히 1945년 12월 황치헌 목사가 갑자기 담임목사직을 사임하자 난관에 빠진 교회를 수습하고, 새로운 담임목사인 김인영 목사를 청빙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청년회 회장과 교회학교 교사, 성가대 대장, 유사부장으로 헌신하였습니다.
동시에 신창균 장로는 기독교의 각종 회의에 교회 혹은 감리교의 대표로 참가하였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각 교파로 나눠 환원하기보다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는 통합된 교단으로 남기 위해 조직한 ‘기독교조선남부대회’에 재정부장으로 활동하였고, 기독교조선남부대회가 해체된 후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재건하는 위원으로 일하였습니다.
그리고 감리교가 해방 직후 복흥파와 재건파로 분열되었을 때에는 두 파의 합동을 위해 노력하였고, 1954년 호헌파가 분리되었을 때도 통합을 위한 역할을 하였으며, 총리원 이사와 감사로도 활동하였습니다. 1976년 갱신측이 분리되었을 때는 정동제일교회가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중립’을 결정하게 하여 이후 감리교가 다시 통합되는 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1976년 정동제일교회가 예배당 건축을 추진하며 의견이 갈라져 대립할 때의 일입니다. 대지가 좁으니 기존의 예배당을 헐고 새 예배당을 짓자는 의견과 기존의 예배당을 보존하고 새 예배당을 짓자는 의견이 대립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기존의 예배당을 헐지 않고 그 옆 공간에 새 예배당을 건축하도록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결국 1897년에 봉헌된 벧엘예배당은 헐리지 않고 국가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감리교회의 자랑스러운 신앙유산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신창균 장로는 해방 직후부터 통일운동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가장 큰 사명이자, 제2의 독립운동이라 생각하고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사업체를 빼앗기는 등 경제적으로 크게 피해를 입었고, 여러 차례 옥에 갇혔으며 자녀들도 고통을 당했습니다. 민주사회당 국민당 한국독립당의 중요 직책을 맡아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였으며, 1948년 4월에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김구 선생과 한독당 대표로 참가하여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후 돌아왔습니다.
1956년에는 평화통일, 남북협상 정책을 기본노선으로 하는 ‘진보당’을 조봉암과 결성하였습니다. 이러한 진보당 활동과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의 조봉암 돌풍 등이 이승만 정권을 자극하여 1958년 ‘진보당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년의 옥고를 치룬 후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그 후 통일사회당과 민족통일촉진회,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에 참여하여 숱한 구속과 탄압에도 굴함 없이 통일운동에 매진하여 ‘통일운동사의 산 증인’이 되었습니다. ‘4.19 혁명상’(1995년), ‘늦봄 통일상’(2002년), ‘백범정신실천상’(2004년)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5년 3월에 별세하여 ‘범민족통일장’으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회고록 『가시밭길에서도 느끼는 행복』(1997년)을 남겼습니다.
결론
신창균 장로는 소년 시절에 기독교에 입문한 후 역경 속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붙들고 어려움을 이겨내는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3·1운동에 참여하여 고난을 당하였고, 그 후에도 항일 동맹휴학 사건, 사범대학 입학과 교사 부임, 마카오 생활, 남북협상 참가, 그리고 통일운동까지 어느 것 하나 편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라와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을 외면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삶 모두를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명을 감당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우리에게 ‘통일’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2. 우리나라의 통일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6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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