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6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7과 교회여성운동가 방현덕 장로

나효선 2016. 7. 30. 01:11

기독교대한감리회 2016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7과 교회여성운동가

방현덕 장로

 

* 성경봉독 : 시편 127:1~5

* 참고성경 : 마가복음 7:24~30

* 요절 :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시 127:3)

 

 

서론

이달의 인물은 시온교회 방현덕 장로입니다. 그는 가정생활위원회 총무와 「새가정」 주간, 그리고 감리교여선교회 전국연합회 회장, 감리교신학대학 교수로 활동한 교회여성운동의 지도적인 인물입니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그는 먼저 상실된 가정을 회복하고 건설하기 위해 ‘기독교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부모가 그 역할과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 함께 생각하고 참여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정치에서 소외된 여성의 참여권, 그 중에서도 교회의 여성 참여권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본론

방현덕 장로는 1926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방 직전 세례를 받고 입교했으며 감리교신학대학(1964년)과 미국 스카렛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가정생활위원회 총무로 활동하였습니다. 가정생활위원회는 ‘여성 문제와 기독교가정생활에 관한 전반적인 지도 계몽’을 목적으로 설립된 초교파 교회여성운동 연합체입니다. 이 단체는 가정주간 행사, 가정생활전국대회 개최, ‘장한 남편상’ 시상, 가정 문제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는 가정생활위원회를 이끌며 초교파적 교회여성 운동체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동시에 월간 기독교 잡지인 「새가정」 주간으로도 활약하였습니다. 「새가정」이 가정생활위원회가 추진하는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기 때문입니다. 「새가정」은 본래 대한기독교서회에서 「기독교 가정」이란 이름으로 발행했는데, 이것을 넘겨받아 1957년 6월호부터 가정생활위원회가 발행하였습니다.

 

그는 가정생활위원회 총무와 「새가정」 주간으로 활동하면서 가정의 중요성을 깊이 있게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현대 사회의 격심한 변동으로 현대의 가정들이 제 기능을 상실하고 결과적으로 가정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상실된 가정 회복을 위한 해결책도 동시에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기독교 가정’이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질서에 의해서 세우시고 태초부터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가정은 육신이 출생하는 첫 무대요, 몸과 마음이 함께 눈뜨는 온상이다. 생존의 긴요한 선악의 과정들과 영적 실재들을 가정에서 체험한다. 이곳에서 가족들이 함께 꿈꾸고, 기도하고, 배우며, 같이 자란다.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의 출생의 기쁨과 죽음의 슬픔을 체험하며 개성을 가진 가족구성원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생의 존재 의의를 추구해가는 것이다.”

 

그는 파괴된 가정을 회복하고 회복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부모가 역할을 다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선물에 감사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생각과 연구 활동을 『기독교 가정교육론』이란 책으로 엮었습니다.

 

방현덕의 활동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은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전국연합회를 지도하고 성장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선교회전국연합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1974년 여선교회 총회에서 전국연합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분열된 감리교의 통합을 호소하고, 여성의 교회 정치 참여권 획득을 요구하는 등 본격적으로 여선교회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여선교회의 활동 공간이자 선교센터인 여선교회관 건립에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옛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 교사로, 당시 감리교신학대학 남학생 기숙사로 사용하던 충정로 건물을 구입하기로 하였습니다. ‘옥합 깨뜨리기 운동’을 펼쳐 회관매입 기금을 모금하고, 1977년에 매매계약을 하였지만 학교에서 팔지 않기로 결정하자 여선교회원들은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한남동의 미 연합감리회 선교부 건물을 처분하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선교회는 선교부와 협의를 계속하였고 선교부 건물을 넘겨받았습니다. 선교부는 이 건물을 여선교회에 양도하고 여선교회는 선교부에 선교기금을 기부하는 형태를 취하였습니다. 형식상 ‘기부’였으나 여선교회로서는 1억 3천여 만 원을 지불하고 구입한 셈입니다. 이렇게 하여 여선교회의 오랜 숙원이던 독자적인 여선교회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여선교회관은 여선교회원들의 교육과 교제의 장이 되었고, 대사회적인 선교센터로도 활용되었습니다.

 

당시 전국연합회 임원의 임기가 4년이었기 때문에 총회를 4년 주기로 열었습니다. 그러나 1981년부터는 전국대회와 별도로 총회를 소집, 임원을 개선하게 되었으며, 회장 부회장 서기 회계 및 각 부장 임기도 4년에서 2년으로 줄였습니다. 이러한 회칙에 따라 1981년 12월 15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27차 총회’에서 방현덕 장로가 전국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83년 총회에서도 회장으로 다시 선임되어 1985년 12월까지 직임을 수행하였습니다. 재임 중인 1981년 7월 13일부터 21일까지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 세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 여선교회의 위상을 과시했습니다.

 

또 방현덕 장로는 여선교회 전국연합회 회장으로 봉직하는 동안 남녀가 함께하는 새로운 신앙공동체, 증인공동체, 선교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교회 여성의 정치 참여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1984년 감리교 총회에서 모든 감리교 의회 기구에 평신도 대표의 30%를 여성으로 한다는 규정을 통과시키는 큰일을 해내었습니다. 여선교회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후배들의 사업과 운동을 격려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한편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에도 전념하다가 1991년 은퇴하였습니다. 서울 시온교회에서 수요예배의 사회를 보다가 쓰러진 후 투병하다가 1991년 8월 18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시온교회에는 1960년대에 출석하여 속장·여선교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1974년 장로로 취임하였으며 별세할 때까지 헌신하였습니다.

 

 

결론

방현덕 장로는 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기독교 가정이 그 역할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가정의 회복과 건설을 위해 자신이 선교 현장에 뛰어들어 활동했습니다. 우선 교회연합단체에서 일하며 교회 여성들에게 가정의 중요성을 알렸고, 남성들도 이에 동참하도록 하였습니다.

방현덕 장로는 감리교 여선교회의 활동을 지도하고 이끈 지도자였습니다. 여선교회원들의 의견과 활동을 수렴하여 이를 구체적인 사업으로 전환시키는 데 힘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여선교회관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남녀가 동등한 동반자의 관계에서 사회와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다양한 이 시대에서 가정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2. 감리교와 한국 교회에서 여성들의 참여권이 어떻게 보장되고 있는지 현황을 알아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6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