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6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6과 농촌운동가 조민형 장로

나효선 2016. 6. 27. 18:41

기독교대한감리회 2016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6과 농촌운동가

조민형 장로

 

* 성경봉독 : 사도행전 7:54~60

* 참고성경 : 히브리서 11:33~40

* 요절 :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서론

6월에 소개하는 인물은 공덕교회 조민형 장로입니다. 그는 1920~30년대 한국 교회가 전개한 농촌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분입니다. 이론과 실제, 경험과 지식을 겸비한 최고의 기독교 농촌운동가로 한국 농촌의 위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이를 극복하고 이상적인 농촌을 건설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농장에서 농사를 지었고, ‘계’를 조직하여 농민들의 공동생활을 시도하였습니다.

또 조민형 장로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조선농촌구제책』이란 기독교농촌운동사에서 기념비적인 책으로 엮어내어 일반인과 사회가 농촌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농촌운동이 경제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운동으로 시작되는 것이기에 기독교인의 책임이 막중함을 주장하였습니다.

 

 

본론

조민형 장로는 1896년 함경남도 북청의 농촌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야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졸업하였습니다. 귀국하여 서울 종교교회에 출석하면서 남감리회가 설립하고 운영하는 배화학교의 부속 광희문여학교 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배화학교 교사인 김응집 이정찬과 각종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여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그 후 야오야마학원 동창인 전영택 목사의 소개로 협성여자신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동시에 그는 종교교회 엡웟청년회 부회장, 전도사(장로) 등을 맡았고, 서울과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집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순회 전도집회를 하면서 당시 피폐해진 한국 농촌의 실정을 생생하게 체험한 조민형 장로는 우리 민족의 살길은 농촌계발에 있음을 절감하였습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그는 돌연 학교를 사직하고 농촌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먼저 한국과 일본의 농촌을 시찰한 후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실험에 나섰습니다. 1924년에는 ‘선만개척주식회사’ 소유이며 일본인 이와세가 책임자로 있던 김포농장에 들어가 본격적인 농촌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농사를 지으며 농촌을 살릴 길을 모색하였습니다. 동시에 선진 농업기술을 도입하여 농촌에 보급하였고 농업 협동조합을 구상하여 농촌 발전을 위한 다각적인 시도를 하였습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큰 타격을 받아 경제적 곤란에 빠졌으며 정신적으로도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조민형은 1927년 김포 포내면 걸포리에 ‘걸포리산업저축계’를 조직하여 농촌운동의 시험장으로 삼았습니다. 이 계에서 그가 가장 먼저 실시한 것은 농한기를 이용한 새끼 꼬기와 가마니 짜기였습니다. 일정기간을 두고 한 사람이 가마니 30립씩을 의무적으로 짜서 계에 납품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충분한 양의 가마니를 모았습니다. 현지에서 쓸 가마니를 남겨 놓고 판매한 것만도 상당하였습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김포농장 안에 논 1정 2단보를 설정하고 새로운 개량방법을 사용하여 공동경작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낼만한 결실을 얻었습니다. 이후 이 논은 곡종을 얻기 위한 채종답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착수한 사업은 식량의 공동구입이었습니다. 8, 9월 농가에 식량이 떨어져 굶주릴 때에 그는 저리로 돈을 얻어 서울에서 값이 싼 좁쌀을 공동구입하여 계원들에게 분배했습니다. 겨울에는 필요한 옷감을 공동구입하였습니다. 그는 계원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정신적 각성과 주부들의 살림살이에 대한 계몽과 실행에도 힘썼습니다. 조민형 장로가 지도하는 이와 같은 사업으로 걸포리 산업저축계는 1년 동안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자 계원들은 물론 인근 지역의 농민들에게서 많은 호응을 받아 1928년 김포 일대에 8곳 계를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실제적인 농촌 생활을 경험한 조민형은 더욱 체계적인 농촌운동을 위해 1929년 『조선농촌구제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시의적절한 시기에 발간된 이 책은 한국에서 전개된 농촌운동에 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농촌운동의 선구적이고도 핵심적인 지침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농촌운동의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지침은 정신운동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농촌진흥이 즉 경제운동이 아니다. 정신상 기초가 없는 경제운동은 일일이 실패에 돌아가고 만다. 그런고로 우리는 먼저 정신운동 즉 종교운동으로 농촌운동의 첫걸음을 삼지 아니하여서는 안 될 것이라 한다. … 조선의 30만 기독교 신자들이여, 우리의 특권이 이에 있으며 농촌의 진흥, 조선 사람의 활로가 오직 그리스도에 있음인저”

 

이 책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른 글이나 책보다 더 현실적 경험에 기초하여 썼기에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이로 인해 농촌뿐 아니라 사회 각층에서 상당한 관심과 호응을 보였고, 교재로 활용되었습니다.

 

1930년에는 황해도 신천에 ‘이상적인 모범 농촌 ’을 건설하기 위해 설립된 신천농민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1년 정도 후진 양성에 힘썼습니다. 그 후 황해도 연백의 송포농장에서 몇 년 동안 활동하다가 다시 김포로 복귀하였는데, 1939년 5월에는 김포면 면협의원에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1940년경 서울로 이주하고 서울 공덕교회로 교적을 옮겨 교회를 섬겼습니다.

 

해방 후 조민형 장로는 행정가로 변신하였습니다. 미 군정기에는 서울시 고문관, 정부수립 후인 1949년 5월에는 김포군수로 임명되어 1년 동안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감리교가 복흥파와 재건파로 나뉘어 대립했을 때 복흥파의 수습대책위원회 책임을 맡았고, 1949년 두 파가 하나로 합할 때에는 통일전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나자 숨어 지내다가 8월에 붙잡혀 납치된 뒤로 소식이 끊겼습니다. 공덕교회는 2002년 100주년 기념행사 때 그를 기념하는 ‘6·25 순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결론

조민형 장로는 무엇보다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기독교농촌운동가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실제로 농촌에 들어가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농촌의 문제를 발견하였고, 농민들과 공동으로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한국의 농촌문제를 보고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얻은 경험과 지식을 글이나 책으로 세상에 널리 알림으로써 당시 농촌의 문제가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임을 인식하게 하였고, 또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농촌문제와 사회문제에 적극 나서도록 하였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우리나라의 농촌교회가 어떠한 형편에 놓여 있는지 알아봅시다.

 

2. 농촌교회를 돕기 위해 어떠한 활동을 할 수 있을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6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