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6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5과 한국 역사 풍속화의 거장
김학수 장로
* 성경봉독 : 로마서 5:3~8
* 참고성경 : 시편 137편
* 요절 :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
서론
이달의 인물은 시온교회 김학수 장로입니다. 그는 한국의 풍속과 역사 및 기독교 성화를 활발히 그린 화가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김유탁 김은호 변관식에게 사사를 받고 그림 그리기에 정진하여 역사와 풍속화의 대가로 인정받았습니다.
모태신앙인인 김학수 장로는 6·25전쟁 때에는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피난하여 부산에서 시온교회 창립에 크게 기여하였고 이후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이 교회에서 헌신하였습니다. 특히 병고침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는 풍속화의 기법으로 ‘한국에 오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문화선교에 몰두하였습니다.
본론
김학수 장로는 1919년에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남산현교회에서 영아세례를 받았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매순간 그를 지키고 성장시킨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30년 소학교인 신흥학원을 졸업하고 성경구락부에서 3 년간 수학하였습니다. 이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지만 다음과 같이 다짐을 하며 그 시절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매일 밤마다 잠들기 전에 뜨락에 나가 별을 보며 기도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지혜를 간구했다. 그때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결심했다. ‘비록 친구들처럼 학교에는 못 다니지만 어머님 말씀대로 예수님을 잘 믿고 열심히 배운다면 장차 나도 유명한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반드시 그런 사람이 되자.’”
이 각오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지만 교회에서 설교 말씀과 선각자들의 강연을 듣고 또 그들의 삶을 보면서 “교회를 다니기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각오하였습니다.
해방 후 북한정권이 들어선 후 미술동맹에 가입하지 않아 공산당의 미움을 산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12월 아내와 아들 딸을 평양에 남겨 두고 홀로 피난을 내려왔고 다시는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후 김학수는 결혼할 때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가족을 그대로 두고 떠나온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독신으로 지내며 제자 40여 명을 자녀처럼 돌보았습니다.(1989년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모두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후 몇 차례 가족과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던 그는 1936년 김유탁의 문하에 들어가 사군자를 배우면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1937년 ‘묵난’으로 일본 동경 남화회전에 당선되었습니다. 1942년 서울로 올라와 김은호 문하에 들어가 사사받았습니다. 그는 김은호에게서 동양화의 원리를 배우며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경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1943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동양화 ‘노안’(蘆雁)을 출품하여 입선하였습니다. 1944년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하면서 해방을 맞았고, 그 후 설립된 평화중학교와 성화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김학수는 6·25전쟁으로 월남한 후 피난 중 만난 성화신학교 제자들과 함께 부산에 거주하였습니다. 이곳에서 한승호 안상현 전도사를 만나게 되었고, 의기투합하여 1951년 10월 ‘평양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이 교회는 북한 지역 특히 평양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의 신앙공동체가 되었는데 얼마 후에 교회 이름을 ‘시온교회’로 바꾸었고 다시 서울로 이전하여 오늘의 시온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교회 창립 때부터 출석하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헌신하였습니다. 특히 교회학교 교장을 맡는 등 교회교육에 애썼으며, 1960년대 초에 장로로 선임되어 평신도 지도자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림 그리기도 계속하여 1955년에는 변관식 문하에서 사사하였습니다. 변관식은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실경산수화의 최고 대가입니다. 1966년 신세계화랑에서 첫 개인전인 ‘혜촌 김학수 한국풍속화’전을 열었고 이후 한국의 풍속과 역사를 주제로 한 역사풍속화와 기독교 성화를 활발히 그렸습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주제별 연작에 몰두하여 ‘능행도’, ‘삼강행실도’, ‘세종대왕 일대기’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대표작인 ‘한강대전도’는 1964년부터 2006년까지 40여 년에 걸쳐 한강의 발원지인 오대산에서부터 강원도 정선과 영월을 지나 강화도에 이르러 서해 바다와 만나는 한강 1,300리를 북녘 가족을 그리는 애끓는 심정으로 생생히 묘사한 350m의 대작입니다. 김학수 장로의 그림은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대상을 묘사하면서도 화면 전체에 웅장하고 활달한 힘이 넘치는 것이 특징입니다.
병 고침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는 예술의 목표가 국전 당선이나 대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오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일대기와 성경 주제를 한국적 풍속화 기법으로 재현하였습니다. 특히 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예수님 일대기 33점과 한국기독교 역사화 66점을 제작하여 전시회를 연 후 예수님 일대기 그림은 연세대학교 루스채플에 기증하였고, 한국 기독교 역사화 66점은 경기도 용인 순교자기념관에 기증하였습니다.
이렇게 김학수 장로는 그림을 통해 예수님을 전하는 데 적극이었습니다. 삶이 평탄하지 않았지만 평생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느꼈고, 삶의 모든 여정이 자신의 노력과 지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항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 ‘그림을 그리며 사는 것’,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것’ 등 세 가지를 감사하였습니다. 자기의 지난 세월과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또 우리나라의 인륜도덕이 타락함을 안타깝게 여겨 “한국충효위인도” 180점을 제작하여 경기도 의정부시 경민대학교에 기증하여 젊은이들이 충신, 효자, 열녀, 위인들의 행실을 본받게 하였습니다.
한국기독교미술인상(1992년)과 대한민국문화훈장(1992년)을 받았으며 의재미술상(2000년), 아름다운미술인상(2001년), 인제대학교 인성대상(2002년)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9년 5월 8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결론
김학수 장로는 다가온 고난에 굴하지 않고 기독교 신앙으로 이를 이겨냈습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신앙과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신앙 안에서 꿈을 이루고 그림에서도 ‘대가’로 인정받았습니다. 풍속화와 역사화를 새롭게 해석하는 일에 몰두하였고, 기독교 미술 활동의 기반을 마련하고 그림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개척자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또 김학수 장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는 교회를 설립하고 평신도 지도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생활이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고 돌볼 뿐 아니라 그들이 꿈을 성취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는 선행도 계속하였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그 의미와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2.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방문하여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6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Ⅳ
그림 출처 : http://cafe.naver.com/kyungminuniversity/141 경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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