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6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4과 덕성여대 설립자 차미리사

나효선 2016. 4. 24. 23:10

기독교대한감리회 2016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4과 덕성여대 설립자

차미리사

 

* 성경봉독 : 고린도후서 4:7~15

* 참고성경 : 사무엘상 2:1~10

* 요절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7)

 

 

서론

4월의 인물은 차미리사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 민족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며 끝까지 올곧은 길을 걸어간 교육가입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불행 속에서 기독교를 접하였고, 이를 통해 신앙뿐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새 삶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차미리사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새 삶을 살게 되었기에 자신이 받은 은혜를 사회에 돌리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중국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당시 식민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교육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특히 암흑 속에 있던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의식과 생활을 개선하는 실제적인 활동에 앞장섰습니다.

 

 

본론

차미리사는 1880년 서울 마포에서 태어났습니다. 18세에 결혼하였으나 2년 만에 남편과 사별한 후 스크랜턴 대부인을 만나 기독교인이 되었고, 상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미리사’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김씨 성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였기에 1930년대까지는 ‘김미리사’로 불렸습니다). 1905년에 중국으로 유학하여 남감리회 여선교부에서 운영하는 쑤저어여학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의 흥사단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동시에 캔자스 더스칼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1917년 남감리회 여선교부에서 파송하는 선교사로 귀국하여 종교교회에 출석하면서 배화학당의 교사와 기숙사 사감이 되었습니다. 배화학당에서 여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가 1920년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학생시위로 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차미리사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교육은 인생의 생명이다. 자녀는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고 교육은 인생의 생명을 완전하게 한다.”는 신념을 이루기 위해 교육사업에 헌신하였습니다. 특히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여성교육이 시급하다는 것을 깨닫고, 여자교육운동과 여자생활개선운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1920년에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여자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는 강연에서 “조선 여자의 교육!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제일 큰 문제”임을 강조하였는데 신문에 게재한 “일천만에게 새 새명을 주고자 하노라”는 글에서 자신의 각오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이제부터 나의 한 몸을 조선여자 교육에 바치어 아주 헌신하려고 합니다. 현재 조선에 여자 교육기관은 관공 사립의 학교가 있어서 해마다 수천의 졸업생을 낸다고 하나 이것은 정부의 힘이나 외국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요, 우리 사람-더욱이 우리 여자의 손으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에 분개하여 지식도 금전도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천만의 조선여자 여러분과 함께 아무 감각도 없는 우리의 자매를 위하여 일하려고 하는 것이올시다.” - 동아일보, 1921. 2. 21

 

차미리사가 주도한 <조선여자교육회>의 활동을 당시 언론은 이렇게 격찬하였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 일어나는 운동이 곧 여자해방의 운동이니 처음에는 교육운동으로서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사회운동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암흑에 침잠해 있는 조선 여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향상을 위해 희생적인 노력을 하는 조선여자교육회의 하계 지방순회강연은 조선여자계의 일대 광명이며 생명 있는 신운동이다” - 동아일보, 1921. 7. 11

 

1920년 4월 19일에 서울 종교교회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야학회’를 설치하여 글자를 모르는 여자들에게 한글과 산술, 도화 등을 가르쳤습니다. 1921년에는 서울 청진동에 새 교사를 마련하여 ‘근화여학교’란 이름으로 새 출발을 하였습니다. ‘양복과’, ‘상과’ 등을 개설하여 기술, 사무교육 등 실제적인 능력과 합리적인 사고를 가르치면서 실업교육이 남자에게만 해당된다는 당시의 편견을 깨는 역할을 했습니다. 초기에는 여자에게 힘든 일을 시키려 한다는 비난에 시달렸지만 그는 여자에게도 직업이 필요하고, 여자 역시 노동을 통해 정당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의 여자 실업 교육 사상은 해방 후 여자상업고등학교와 여자실업학교 확산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교육활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차미리사는 강연회 음악회 연극회 바자회 등을 개최하였으며, 총독부는 물론 외국인 선교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자립·자력으로 학교를 유지하고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교사를 초빙하는 한편 직접 학교의 교사이자 경영자로 학교 사무 전체를 주관하였습니다. 평소 주장하였던 자립의 삶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는 늘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스스로 깨달아 알아라!”를 강조하였습니다.

 

여자생활개선운동을 위해서는 옷을 다려서 입을 것, 다듬이질을 하지 말 것, 옷을 염색해서 입을 것, 미신을 타파할 것, 수시로 빨래를 할 것, 청결을 유지하고 자녀들을 씻길 것을 직접 시범을 보였으며, 각종 계몽 강연 활동으로 이를 호소하였습니다.

 

일제 말기에는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일제의 시비로 1938년 ‘근화여학교’란 명칭을 ‘덕성학원’으로 바꾸었고, 1940년에는 교장직에서도 물러났습니다. 해방 후에는 그동안 계획해온 여성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위해 헌신하여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을 개교하였고 이것이 오늘의 ‘덕성여자대학교’로 발전하였습니다. 1952년에는 덕성여자대학교 이사장직에서 사임하였고, 3년 후인 1955년 6월 1일 “온전한 독립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유한이로다.”는 말을 남기고 별세하였습니다.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결론

차미리사는 여자 교육의 개척자로 여자의 권익 향상과 해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평생 실천한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자신이 배운 경험과 지식을 한국의 여자, 그 중에서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에 있던 이들과 나누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야학회’를 설치하여 문맹 상태인 여자들을 깨우쳤고, 이를 오늘의 덕성여자대학교로 발전시키는 데 헌신하였습니다.

특히 차미리사는 여자에게 직업이 필요함을 강조하였고, 이를 위해 여학교에서 실업교육을 실시하여 당시 실업교육이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는 편견을 깨뜨렸습니다. 이러한 여자 실업교육사상은 해방 후 여자상업고등학교와 여자실업학교 확산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우리 사회와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2. 찾아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6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