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6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3과 독립운동가
황도문 장로
* 성경봉독 : 예레미야 1:4~10
* 참고성경 : 마태복음 5:13~15
* 요절 :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렘 1:10)
서론
3월은 우리나라의 독립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난 달입니다. 한국의 교인들도 신앙적 동기에서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평화적 만세시위를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는 많은 수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을 통해 기독교는 민족을 위한 종교로 인식되었고, 기독교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이달의 인물은 강화 선두교회 황도문 장로입니다. 그는 학생으로 서울에서 3·1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교인들과 강화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그 후에는 고향에서 장로가 되어 교회와 지방을 섬기는 지도자로 역할 하다가 6·25전쟁 때 납치되어 희생당하고 말았습니다.
본론
황도문 장로는 1896년 7월 6일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사립 흥천 합일학교(1912년)와 서울의 배재학당 사범전수과(1914년)를 졸업하였습니다. 1917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9년 3·1 만세운동을 맞게 되자 김원벽 윤화정 정석해 등 학생회 선배들의 지휘를 받으며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였고 3월 5일 학생들만의 만세시위에도 적극 가담하였습니다.
이후 황도문은 고향으로 돌아와 강화읍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그는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을 해야겠다 생각하여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 등을 가지고 귀향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출석하는 선두교회의 본처전도사(장로) 황유부와 길직교회를 담임하면서 강화남구역을 관리하던 이진형 목사, 온수리의 유봉진 권사 등 교회 지도자들을 3월 8일에 만나 유인물을 주며 서울의 독립운동 상황을 설명하였습니다. 이들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다음날(9일) 주일 예배 후에 길직교회에서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이튿날 모임에는 위의 네 사람 외에 강화남구역 교회의 교인들 몇 사람이 더 합세하였습니다. 이날 모임에서 황도문은 서울의 시위 상황을 자세히 소개하였고, 참석자들은 논의 끝에 강화에서도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날 참석한 사람들은 후에 ‘길상결사대원’이라 불렀습니다. 황도문은 지도부 3인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고, 구체적인 시위계획과 추진 임무를 맡았습니다.
지도부는 3월 11일에 모여 만세시위를 결행할 날짜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인 3월 18일로 잡고 장소도 강화읍으로 하여 전 강화도 주민들이 참여하는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독립선언서’, ‘국민회보’ 등의 유인물과 함께 ‘강화인민에게’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만들었습니다.
“조선인은 거국적으로 독립운동에 열광하고 있다. 우리 강화군에서도 이를 결(決)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여야 할 것이니, 독립만세를 부르면 조선의 독립은 자연히 기약될 터이다”
이렇게 만든 유인물들은 지역 교회들을 통해 강화 전역에 배포되었고, 교회 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 시위 참여를 권면하였습니다. 시위는 계획대로 3월 18일 오후 2시경 강화읍시장에서 시작해 밤늦게까지 계속되었고,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2만 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시위는 강화 전역으로 확산되어 4월까지 계속되는 강화 만세시위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 일로 지도부의 유봉진 권사를 비롯한 많은 감리교인들이 체포되었습니다. 다행히 황도문은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여 체포를 면하였습니다.
황도문은 한동안 강화도 남쪽에 있는 ‘신도’와 ‘덕적도’로 피하여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신흥학교, 합일학교의 교사로 봉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학생들을 데리고 강화 마리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에는 단군의 역사를 설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다같이 외치게 하였습니다. 당시 학생으로 수학여행에 함께했던 김호신 장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어느 봄날이었다. 황도문 선생은 학생들을 데리고 강화 본도에 있는 마리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학생들은 들뜬 마음으로 기쁘기만 했다. 황도문 선생도 기뻐했다. 그러나 황도문 선생은 마리산 꼭대기에 있는 참성단에 이르자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면서 단군 할아버지의 역사를 설명하더니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사력을 다하여 만세를 선창할 때의 선생의 그 용감한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만일 누군가가 당국에 고발했으면 모두 다 잡혀갔을 것이다.”
또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독립군과도 접촉하며 군자금을 마련하여 보냈습니다. 당시 군자금 마련을 위해 개성에서 홍삼을 사다가 찐 후 배편으로 중국에 보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3년 후 3·1운동 지도자들이 옥에서 나오고 일제의 감시도 풀리자 황도문은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를 섬겼습니다. 1922년 9월 22일 강화에서 열린 ‘인천지방회’에서 본처전도사(장로)로 임명된 이후 다로지(선두)교회와 월오지교회, 산준교회에서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교회를 생각하고 돌보는 사람이었습니다. 허름한 집에서 사는 그에게 사람들이 “전도사(장로)님이 어떻게 이런 누추한 곳에서 사느냐”고 물으면 그때마다 “교회를 새로 짓기 전에는 내 집을 지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교회에 대한 사랑, 헌신과 봉사로 인해 1939년 붉은 벽돌로 40평의 선두교회를 건축하였고, 나중에 자신의 기와집을 지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교회와 강화 지역교회 및 인천지방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지도자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길상면장으로 일하였으며 계속하여 선두리교회 장로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그해 9월 25일 개성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2001년 독립만세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받았고, 유해는 2008년 4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결론
황도문 장로는 평생을 교회와 민족을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 신앙을 끝까지 이어갔습니다. 또 교회가 설립한 선교 학교인 흥천 합일학교, 배재학당, 연희전문학교에서 신앙교육과 함께 민족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그는 3·1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고향인 강화에서 만세시위를 주동하였습니다. 이후 교육사업과 교회전도사업에 앞장서서 활동하다가 6·25전쟁 때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출세와 부귀를 구하지 않고 빛도 없이 끝까지 주님께 충성하다 순교한 신앙인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신앙적으로 사회와 나라의 문제에 어떻게 참여해야 할까요?
2. 우리 교회나 지역사회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과 후손들을 찾아봅시다.
그들을 기억하고 돌보기 위해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6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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