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6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2과 중앙대학교 설립자
임영신 장로
* 성경봉독 : 마태복음 6:25~34
* 참고성경 : 마가복음 12:32~33
* 요절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서론
2월에 살펴볼 인물은 남산교회 임영신 장로입니다. 임 장로는 부모가 선교 초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근대적인 사상에 적극적이었기에 신앙으로 양육 받으면서 일찍부터 신학문을 접하였습니다. 또 민족의식 교육을 받아, 항일운동에도 적극 나섰습니다.
그가 고난당하는 민족의 현실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것은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은 ‘기독교 신앙 안의 교육’이었습니다. 이후 그의 삶 전체를 이것을 이루는 일에 바쳤고 결국에는 오늘의 ‘중앙대학교’란 큰 결실을 맺었습니다.
본론
임영신 장로는 1899년 충청남도 금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난히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던 그는 14세에 금산교회에서 집회를 하던 여자 선교사 콜튼(S. A. Colton, 전주 기전여학교 교장)을 찾아가 공부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토로하였습니다. 그 후 콜튼 선교사가 입학원서와 초청장을 보내오자 결혼을 강요하며 진학을 극구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해서 기전여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기전여학교에서는 민족의식이 강한 박현숙 선생이 지도하는 ‘공주회’라는 비밀결사대에 참여하여 항일의식을 키워나갔습니다. 나라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매일 드렸습니다. 일본어 시간에 입을 열지 않았고, 아침 조회시간에 일본 국가를 부르지 않았으며 교실 정면에 붙은 천황 사진의 눈을 뚫어버리거나 먹으로 칠해버리는 등 저항하였습니다. 동시에 이들은 또 보수적이고 전근대적인 풍습에도 과감히 반대하며 쓰개치마 벗기 시위를 벌였습니다.
임영신은 졸업 후인 1918년에 천안의 양대학교 교사로 부임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후 평생 동안 교육활동에 헌신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기도동지회(결사대)를 조직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함태영에게 전달받은 독립선언서를 수백 장 등사하여 몸에 숨기고 전주로 가서 기전여학교 ‘13인의 결사대’ 한 사람으로 전주 만세운동을 주동하였습니다. 이 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6개월의 옥고를 치룬 후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그는 일경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11월 일본 히로시마고등여학교에 유학하였습니다. 졸업 후 공주의 영명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3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때 관동대지진으로 학살된 수천 명의 한국사람 사진첩과 사건자료를 가지고 가서 이승만에게 전달하여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게 했습니다.
미국에서 10 년간 생활하며 남가주대학에서 공부하는(석사학위 논문 : “한국 불교도들의 기독교신앙으로 전향하는 길”) 한편 민족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 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할 생각으로 청과물 장사, 주유소 경영, 불도저 운전까지 돈 버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1932년 1월 귀국한 임영신은 우선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의 농촌계몽사업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민족을 구하는 일은 교육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생각을 구체화하기 위해 먼저 미국에서 모은 돈으로 흑석동에 학교 부지를 마련하였습니다. 1933년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으로 활동하며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이념을 펼치는 교육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중앙보육학교는 독립선언 33인 중의 한 사람인 박희도 전도사와 중앙교회의 장락도 목사가 주도하여 1916년에 설립한 ‘중앙유치원’에 기원을 두고 있는 교육기관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학교 발전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기금을 모은 후 1938년 흑석동에 800여 평의 석조 3층 교사를 신축하고 이곳으로 이전하여 중앙대학교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그러나 1944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신입생 모집을 중지당하고 폐쇄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임영신은 1941년에 조직된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에 중앙보육학교 대표로 참여하였고 1942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조직될 때에는 지도위원을 맡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신생조국을 건설해 갈 인재를 양성하고 그들의 정신적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학교 문을 열고, ‘중앙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여 학교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다시 ‘중앙여자대학’으로 개편한 후 남녀공학의 ‘중앙대학’으로 학칙을 변경하였고, 1953년에는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는 초대총장으로 취임하여 다음과 같이 이념을 구현해 나갔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아들딸들은 자신을 위해서 굳세고 용감하고 어질고 지혜롭고 착하며, 가정에서는 좋은 부모님께 효성 있는 자녀가 되고, 나라에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고, 세계에는 평화의 사도가 되어 주기를 주야로 기도하고 힘들여 노력할 것이며 더불어 그렇게 되리라고 깊이 믿는 바이다. 나의 이념인 의에 죽고 참에 사는 정신으로 나라에 영구히 빛나는 태양과 항상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되기를 기도하는 바이다.”
그는 총장직을 충실히 수행하여 학교의 발전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교육계에서도 인정받는 인물이 되었기에 교육연합회 회장(1965~1973년), 세계교직자연합회 회장(1966년) 등의 직책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1960년에는 남산교회 장로로 피택되어 교회를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섬기는 신앙의 본을 보였고, 감리교의 교회학교 사업을 위해서도 협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오늘의 중앙대학교와 임영신이 있게 된 것은 눈물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한편 임영신은 사회와 정치 활동에도 적극 나섰습니다. 해방 후 유엔대표로 유엔총회에 참석하였고, 1945년 10월 <조선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여성들이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평등하게 확보해야 함을 주장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이승만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초대 상공부장관에 취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장관이 되었으며, 국회의원으로도 당선되어 활약하였습니다. 대한교육연합회장, 상공일보사 사장, 여성계사 사장, 대한부인회 회장(1963~1971년) 등을 지냈습니다. 1968년 아이젠하워상, 1969년 대한민국 청조근정훈장을 수상했습니다. 1977년 2월 17일 별세하여 중앙대학교 교정에 묻혔습니다.
결론
임영신 장로는 교육 사업에 한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그는 100여 년 전 사회를 지배했던 봉건의식의 굴레에 갇히지 않고 노력하여 상급학교에 진학하였고, 식민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항일운동에 나서는 등 미래를 개척하는 열정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고 겪은 사상과 경험을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이를 위해 처음에는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그의 삶을 지지하는 바탕은 기독교 신앙이었기에 항상 함께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우리 삶의 발전을 제약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특히 신앙의 성숙과 발전을 가로막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2. 우리 교회의 교육 현장에 직접 참여합시다.
교회교육의 발전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6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Ⅳ
사진출처 : 중앙대학교 홍보대사 최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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