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6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9과 사회사업가 장세환 장로

나효선 2016. 9. 30. 00:05

기독교대한감리회 2016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9과 사회사업가

장세환 장로

 

* 성경봉독 : 골로새서 1:3~8

* 참고성경 : 마태복음 6:19~21

* 요절 :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 1:6)

 

 

서론

9월의 인물은 아현교회 장세환 장로입니다. 그는 결혼 후에야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신앙을 갖게 되면서부터 교회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아현교회뿐 아니라 감리교를 대표하는 평신도로 감리교의 중앙 정치 활동에 깊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업으로 얻은 것을 교회 개척과 목회자 지원을 위해, 또 예배당 건축을 위해 아낌없이 희사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본론

장세환 장로는 1902년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32년에 부인 매영숙과 서울 아현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예배당을 건축하고 있었기에 건축 공사에 열정을 갖고 참여하였고, 그해 12월 세례를 받은 후 교회에 헌신하면서 유사와 탁사로 교회 운영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1937년 4월에는 아현교회 엡웟청년회 회장으로 선임되는 한편 10대 학생 중심 조직인 엡웟소년회 고문을 맡아 이들의 활동을 도왔으며, 매영숙은 1930년대 아현교회 여선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장세환 부부의 헌신으로 미자립으로 독립구역을 형성하지 못하고 목회자가 자주 바뀌던 아현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안정이 되었으며, 1938년에는 재정 자립을 이룩하고 독립구역이 되었습니다.

 

그는 해방 후에는 감리교를 대표하는 장로가 되었습니다. 일제 말기 본처전도사가 되어 평신도 대표로 연회에 참석하면서 ‘중앙 정치’ 흐름을 파악하였고, 해방 후 장로로 취임했습니다. 1945년 재건파와 복흥파의 분열 과정에서 수습대책위원회 책임자, 복흥파 총리원 이사, 사회국 위원, 서무국 서기와 회계를 맡으면서 복흥파의 핵심 인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재건파와 복흥파의 통합 작업에 깊이 관여해 1949년 2월부터 복흥측 ‘7인 대표’로 통일전권위원회에 참여하여 서기로 통합의 구체적인 작업을 추진하였고, 1949년 4월 29일~5월 1일 열린 합동 총회에서 총리원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총리원 서무위원장이 되어 통합 이후에도 총리원 운영에 깊이 관련하였습니다.

 

한편 해방 직전 50명 수준으로 떨어졌던 아현교회 교인수는 해방 직후 장년만 200명으로 증가하고, 1950년 초 다시 교인이 크게 늘어 그들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장세환 장로 등이 자진하여 장의자 1개씩을 헌납하였습니다. 이것이 교인들을 자극하여 각 속회에서 장의자를 헌납하는 운동이 일어나 교회 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광나루로 피신하여 교인들과 생활했던 그는 9·28 서울 수복 후 북아현동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인공 치하 3개월 동안 교회가 당한 수난의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배당은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었지만 사택 한 채가 폭격을 맞아 없어졌고, “교인을 두고 피난갈 수 없다”며 홀로 교회를 지키던 조상문 담임목사는 이미 북으로 끌려간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추스르는 한편, 서울로 돌아온 목사들을 초빙해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잠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 시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부산에 내려가 보수동의 2층짜리 적산 가옥을 얻어 ‘신양사’라는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한편, 박승호 전도사 가족을 비롯한 아현교회 교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곳에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예배에 서울에서 피난 온 다른 교회 교인들도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보수동감리교회로 발전하여 감리교의 남부지역 선교거점이 되었습니다. 한편 그는 피난 중에도 여전히 총리원 재단이사, 중앙협의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보수동교회와 총리원 살림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습니다.

 

1953년 말 서울로 올라온 장세환은 끊어진 한강 철교 복구공사를 비롯하여 정부에서 발주하는 철도와 도로 건설공사의 상당 부분을 맡아 사업이 급속도로 확장되었습니다. 본래 베풀기를 좋아했던 부부는 사업으로 얻은 이익을 교회 개척과 목회 지원에 아낌없이 희사하였습니다. 아직 사업이 번창하기 전이었고 전쟁 직후라 모두 자기 살기 바쁜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소유한 북아현동의 집을 교회에 헌납하였습니다. 이 집에서 아현교회 첫 번째 지교회인 ‘북성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954년 감리교의 호헌파 분열 때, 그는 총리원측을 대표하는 평신도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당시 중립적 입장을 취한 김성렬 담임목사와 대립하는 양상이 되었고, 1956년 아현중앙교회가 분립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남아 있는 교인들과 분열을 수습해갔습니다. 그리고 1954년에 확보한 미 연합감리회 여선교부 소유의 땅 위에 새 예배당을 건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1958년 6월 1일 예배당 봉헌식과 아내 매영숙 등의 장로 취임식도 거행했습니다.

 

한편 장세환은 자선사업으로도 유명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교회의 어려움까지도 외면하지 않고 발벗고 나섰으며 특히 농촌 목회자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인 또한 자선사업가로서 애지고아원을 설립 운영하면서 생활이 곤란한 교역자들을 지원하였습니다.

 

1962년 회갑을 기념해 남가좌동에 신흥교회(현 모래내교회)를 개척 봉헌하였고, 1963년 아현유치원 재건에 앞장섰으며, 교회교육에서도 헌신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65년 10월 아현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부인과 함께 ‘교회출석 30년 이상’ 표창을 받았으며, 1975년 10월 창립 70주년을 맞아 ‘교회 중흥 공로자’ 표창을 받는 등 아현교회 역사의 산증인이었습니다. 1991년 8월 14일 9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결론

장세환 장로는 첫 신앙의 감격을 갖고 사랑을 실천한 분입니다. 아현교회에 출석하면서부터 아현교회와 함께한 아현교회 역사의 산증인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고, 교회에서 필요로 할 때에는 자신의 일을 제쳐두고 기꺼이 참여하였습니다. 그의 헌신으로 아현교회는 크게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장세환 장로는 또 사회사업 활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자신의 사업으로 얻은 수익을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도 아끼지 않고 내놓았습니다. 자신의 교회뿐 아니라 다른 교회의 어려움까지도 해결하려고 나섰으며 특히 농촌의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교회에 헌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2. 어떻게 교회와 지역을 섬길 수 있을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6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