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어그램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 인물 5번 유형 : 니고데모

나효선 2016. 12. 23. 00:00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 인물 5번 유형 : 니고데모

 

1. 한 밤의 방문객, 니고데모

 

한 밤중에 누굴 찾는다는 일이 예사롭지 않다.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쉽지 않다. 특히 어른이나 선생을 찾는 일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깊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순간이 왔다 싶을 때 고민 끝에 결정하는 성향이다. 생각 많은 니고데모가 심야의 대화를 위하여 한 밤에 예수를 찾아간 이야기에서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의 모습이 드러난다.

 

일찍부터 호기심과 궁금증이 많아서 관찰, 분석, 생각 등 탐구적인 노력이 남다른 5번 유형은 지식이 많다. 하지만 스스로 지식이 아직 모자라다고 느끼면서 더 많은 지식을 좇다 보면 행동이 미뤄지는 습성이 몸에 배기가 쉽다. 그래서 5번 유형은 아는 것이 많은데 비하여 행동이 굼뜨다는 인상을 주기가 쉽다.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은 4번 유형, 9번 유형들과 함께 위축형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려울 때 위축되는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각기 동기와 원인은 다르다. 5번 유형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남들이 보기에는 충분한 이상인데, 스스로는 결핍을 느끼며 더 알아야만 된다는 생각에 행동을 유보한다.

 

9번 유형은 ‘정신심리적 나태’ 때문에 미루고, 4번 유형은 흠결이 생길까봐 미루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5번 유형은 ‘돌다리도 두드리고 안 지나간다’고 할 정도로 두드려서 들은 소리를 분석하느라 건너가지 못 한다고 할 정도다. 일단 결정을 내리고 나서도 그 결정이 과연 타당한가를 재분석하고 재고하는 성향이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야말로 ‘삼고초려’ 끝에 니고데모가 한 밤에 예수를 찾아갔을 때는 ‘불퇴전의 결단’, 물러설 데 없는 배수진을 치고 나선 장수처럼 앞에 나섰다. 당대에 어떤 사람이 예수를 아는 것보다도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생각하고 나서 방문한 것이라 하겠다. 그의 꽉 찬 지식은 예수와의 첫 대면에서 이미 신앙고백의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본다.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은 환경에 압도당하는 것을 꺼리거나 두려워하기 때문에 낯선 곳, 새로운 장소에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서 여행도 삼가 할 정도다. 그러나 이런 성향을 뛰어넘을 때는 그만큼 편안한 상태일 뿐 아니라 알만큼 알았다는 확신이 섰을 때일 것이다. 무엇보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알았다고 자신감을 가졌기에 가능한 행동이다.

 

니고데모의 첫마디를 보면 알 수 있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다름 아닌 5번 유형이 이런 고백적인 말을 하게 된 배경을 감안하면, 대단한 결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5번 유형은 공허를 기피할 만큼 속이 꽉 차야 되는 성향인데다, 지식의 함정에 빠지기 쉽고,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따라서 관찰, 생각, 분석과 이해의 일련의 과정에서 망설임, 회의, 걱정, 신중함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거쳐서야 행동으로 나서는데, 이쯤해서는 남보다 더 초연하고 용감하게 나선다. 이런 상태에서 5번 유형의 니고데모는 예수도 인정한 만큼 ‘이스라엘의 선생’이요, 유대인의 지도자로 처신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예수를 반대하는 유대인들, 그중에서도 바리새파요, 예수를 후일에 십자가형에 넘겨주는 결정을 하는 산헤드린 최고회의 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를 한 밤에 찾아간 것 자체의 비중이 니고데모의 초연한 상태를 말해준다.

 

 

2. 탐구자 니고데모

 

진리를 찾는 사람인 니고데모는 율법교사로서 탐구자이다. 에니어그램 5번 유형들처럼 생각이 많은 사람이요, 관찰하고 분석하기를 잘 하는 니고데모는 개인적인 관심 뿐 아니라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산헤드린 최고회의 의원으로서 당시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예수를 책임감을 가지고 탐구해야 할 입장에 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마다 예언자라든가 메시야를 자처하며 나선 이들이 있는 상황에서 혹세무민 惑世誣民의 위기를 분별하고 대처해야 할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니고데모가 개인적 특징이나 성향과 더불어 리더십의 책무감을 더하여 조사하였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더욱이 세례자 요한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던 만큼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요, 독립투사 같은 지도자들과도 비교할 처지였을 것이다.

 

그토록 신중할뿐더러, 반대파에 속한 지도자로서 예수를 만난다는 것이 니고데모에게는 마치 화약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메시야 대망 사상을 가지고 있던 바리새파의 관심을 공유하는 니고데모는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임을 알게 된 마당에 그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야인지를 알 길이 예수를 직접 만나는 것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음직하다. 그래서 급기야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를 찾아가 대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의 통합된 특징으로 꼽을만한 ‘느린 생각, 빠른 행동’이 니고데모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으로서 예언자냐 메시야냐를 분별해야 할 역사적 과제 앞에 선 니고데모의 결의에 찬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알렉산더 이바노프 Alexander Ivanov의 1850년도 작 ‘예수와 대화하는 니고데모’란 성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대화중에 예수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하였을 때, 니고데모 특유의 탐구성이 촉발된다. 니고데모가 자기의 지식을 과시하듯이 말한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지식의 한계를 드러냈다.

 

여기에는 니고데모의 회의와 고민이 동시에 표출된다. 자신이 예수에 대하여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찾아온 것과 예수가 드러내는 진리의 차원이 다른 것이다. 메시야 이해의 차원이 다른 것이다.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힘’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니고데모가 속한 유대인, 바리새파, 특히 산헤드린은 힘이 곧 지배 체제 Domination system인데 비하여 예수에게 힘은 ‘지배 없는 질서’ Domination-free order이다. 니고데모가 추구하며 탐구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하는 뜻을 아직 니고데모는 깨닫지 못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가치관이 다르다. 세계관이 다르다. 생각이 다르면 습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니고데모가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예수의 생각을 미처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의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과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니고데모는 예수의 정체성과 표적의 의미를 아직 깨달을 수가 없었다.

 

니고데모가 탐구자로서 지닌 많은 지식과 깊은 생각과 신중한 분석도 예수의 실체와 영성 앞에서는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임을 우리는 객관적으로 본다.

 

 

3. 비밀 제자 니고데모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가운데 한 사람이요, 유대 사람의 지도자였다(요3:1). 예수가 ‘무지배의 질서’로서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유대인들은 ‘지배체제’로서 ‘세상’을 대표한다. 요한복음 상황에서는 바리새파가 바로 그 유대인들의 ‘세상’을 대표한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바리새파는 진보적인 유대인 평신도 운동으로서 그들의 주요 관심은 회개와 하나님의 개념에 따르는 생활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엣세네파 같이) 광야로 물러나는 생활로 들어가지는 아니하였고 일상적인 직업을 통하여 생활을 영위하였으며 따라서 자신들이 유대교적 신앙으로 생각하는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사두개파와 달리) 이 세상적인 유대국가로부터 구원을 기대하지는 않았고 사후의 생명을 위한 구원을 기대하였다.’ (사랑과 진리의 대화, 김영운,p.54)

 

니고데모는 이런 성향을 띄고 산 사람으로 보인다. 예수를 찾아간 목적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더욱이 유대인의 한 지도자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탐구하는 입장이었다.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라고 천명하는 것이 빈 말이 아닌 만큼 그것은 신앙고백에 해당된다.

 

그러나 바리새파에 속한 지도자가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극히 은밀한 일이요 비밀스런 사건이다. 단순한 개인사로만 보면, 예수의 추종자가 되고 신자가 되는 결정적인 일이다. 그러나 지도자로서는 간단하게만 볼 수 없는 사건이다. 게다가 5번 유형의 속성을 지닌 니고데모에게는 또한 함축성이 큰 행동이다.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은 자명한 지식이나 진리도 쉽사리 수용하지 못하고, 따지고 볼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도 확신이 서기 전에는 무모하게 보인다. 예수가 인기가 비록 하늘을 찌를 듯 하였고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들고 따랐어도, 5번 유형의 눈에는 그 역시 무모하게 보이기 쉬운 법이다. 열혈 청년 같으면 과감히 나서서 신자도 되고 제자도 되고 할 법 하지만 5번 유형은 역시 유보적이며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지식과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한 5번 유형에게는 꼭 집어 말하지 않아도 에니어그램 격언에서 찾는 뜻이 서려있을 법하다. ‘자신을 알라.’ ‘무리하지 말라.’ ‘매사를 검증하라.’ 그러니까 남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속에 품은 뜻을 천명하고 결신자가 되고 제자가 되어도, 스스로 최종 결단을 하기까지는 무모하게 처신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죽음의 순간을 ‘진실의 순간’이라 하는 뜻을 실감하게 만든다. 마음속으로 예수를 따르며 신자가 되고, 제자가 되는 결정을 하였더라도 세상에 공표하는 것은 마지막까지 유보한다. 더욱이 자신의 지위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넘어섰다 하더라도 예수의 상황과 관계까지 생각할 때, 그는 ‘비밀 신자’ Crypto Christian, ‘비밀 제자’ Crypto Disciple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니고데모가 누구보다도 예수가 권력 정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하여 고난의 길을 가면서 고뇌하며 번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깊이 동정하고 공감하지 않았을까 본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했을 때(요7:32),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요7:45-52). ‘비밀 제자’의 지경을 넘어 위험을 무릅쓰고 중대 발언을 하는 것을 본다.

 

 

4. 희생적 지도자 니고데모

 

평소에 생각과 관찰을 잘 하는 5번 유형은 어떤 결과를 얻으면 그것을 또 분석하고 이해하느라 신중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일단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 남달리 깊은 이해와 지각이 뛰어난 번 유형은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초연한 자세를 취한다. 심야의 대화를 통하여 예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된 니고데모는 스스로 초연해지면서, 이제는 역설적으로 남들이 보기에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위험에 직면하고 도전한다. 니고데모는 냉철한 이성적 판단력과 탁월한 지각과 감지력에 분별력을 더하여 사태를 꿰뚫어 본다.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고려하여 비밀 신자와 비밀 제자로 처신하던 때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평소에 신중함이 회의적인 자세를 지니게 했다면, 사태의 본질을 통찰하고 확신이 서면 5번 유형은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선견지명에 대담성을 더한 리더십, 높은 분별력에 강한 결단력을 배합시킨 리더십을 발휘한다.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같은 지도자들 가운데서 ‘그를 믿은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라는 말이 의회에서 공공연히 나오고 있을 때, 이미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최고회의 의원으로서 예수를 믿고 있었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변론하자 다른 위원들이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오?’하고 힐난한다.

 

예수가 가는 십자가의 길을 누구도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니고데모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책임을 감당하려 노력할 따름이다. 적어도 산헤드린 최고회의 의원들과 모든 지도자들이 니고데모 자신이 예수와 대면하여 말씀을 들었던 것처럼 예수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고나서 심판을 해도 하라는 지극히 객관적 판단 근거를 갖추도록 권고한다. 그러나 강고한 보수적인 지도층의 독선과 권력에 대한 탐욕에 부딪힌 니고데모는 한 번 더 신중을 기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본다.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권력의 악마성을 보면서 그렇다고 무모하게 함께 죽을 순 없다는 진실을 속에 품는다. 지도자의 초연함과 용기를 아울러 갖추었으나 결정적 순간까지 기다리며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찾는 그야말로 ‘빈틈없는’ Shrewd 통찰력과 ‘멋진 계산’을 하는 듯하다.

 

마침내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최후를 맞았을 때, 그는 또 다른 비밀 제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 의원과 함께 십자가에서 시신을 내려 Deposition 모셔다가 장례를 치룬다(요19:38-42).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예수의 직제자 열 두 사람까지 모두 달아나서 숨었던 살벌한 상황에서 요셉과 니고데모는 모든 것을 각오하고 나선 초연하면서도 처연한 모습이다. 사태를 꿰뚫어보며 달관한 것 같은 니고데모는 자기과시를 하는 것도 순교자를 자처하는 것도 역사에 공헌한다는 것도 아닌 모습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만용을 부린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도, 니고데모는 바로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물면서 예수와 더불어 ‘현존’한다.

 

남들이 보기에 상상하기 어려운 희생을 초연한 마음으로 감당하면서 장례를 치른다. 요셉이 빌라도 총독의 허가를 받고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요19:39). 약 34킬로그램이 되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니고데모도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하고, 어떤 운명도 받아들이려는 각오와 초연함이 분명하다. 처음 교회 신자들과 제자들이 가슴에 품고 산 순교 그 자체였다.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은 이렇게 니고데모처럼 초연함에 용기가 더해지면 희생적인 지도자가 된다. 교회 전승이 말하는 대로 1세기 중에 순교 당하였다. 비밀 제자로 역할과 책임을 다 한 뒤에 결국 천명하고 나서서 순교자가 되기까지 하였다.

 

출처 : 공동체성서연구원 김영운 목사님

   

     

‘예수와 대화하는 니고데모’

알렉산더 이바노프 Alexander Ivanov의 1850년도 작

    

그림 출처 : 도서출판 아포리아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한복음 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