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 인물 4번 유형 : 이사야
1. 환상을 보는 이사야
에니어그램을 아는 사람이 성서 인물을 살피면 4번 유형으로 떠오르는 사람들이 예언자이다. 마찬가지로 성서를 아는 사람들이 에니어그램을 알게 되면 예언자들이 4번 유형임을 알 수 있다. 그중 대표로 이해되는 사람이 이사야라 하겠다.
대선지 major prophets 가운데 첫 손꼽히는 이사야는 그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이사야서가 전체 66장으로 되어있으나 그의 배경에 대해서는 기록이 많지 않다. 다만 그는 선지자 아모스의 아들이요, 여선지자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역대하 26장 22절을 보면 ‘웃시야의 통치 기간에 있었던 다른 사건들은, 초기의 것에서부터 후대의 것에 이르기까지, 아모스의 아들 예언자 이사야가 기록하여 두었다’고 쓰여 있다. 이를 보면 이사야는 역사가이기도 하였다.
랍비 전승에 의하면 아모스는 아맛시야왕의 동생이라 한다. 이사야는 귀족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족이나 귀족처럼 지체 높은 사람들은 대체로 자녀 양육을 유모나 보모의 손에 맡긴다. 부모가 각별히 자녀에게 애정 표현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런 환경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성격 유형은 4번 유형이 되는 경향이 있다.
에니어그램 4번 유형의 3번 날개를 귀족형이라 일컫는다. 자란 배경과 성격의 특성이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4번 유형들은 일상적인 일들, 그중에서도 귀찮게 여기거나 스스로 안 좋아하는 일은 굳이 할 생각을 안 할 뿐 아니라 자신은 면제되었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 그런 일을 할 시간에 공상이나 상상을 하거나 창작을 하려 한다.
그러나 건강하게 살면 자기 성찰에 충실하며 책임감을 가지고 살게 된다. 이사야가 자신의 삶이나 공적인 삶에 있어서도 흠결이 없이 살려고 노력하며 일의 완성도를 높이면서 정의를 추구하며 살려는 노력을 하였기에 예언자로 활동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다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등 4대에 걸쳐 50년간 예언활동을 한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환상을 본 것을 기록하는 데서 이사야서가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꾸짖으시며,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이사야 1:3) 라고 하신 말씀을 전한다.
역사의 전환점인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환상을 본다. 에니어그램 4번 유형의 특성이 오롯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개인주의적이며 개성이 강한 이사야가 성전에서 홀로 기도하던 중에 심오한 환상을 보고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 이해와 자기지식에 열심인 이사야가 지존하신 하나님을 뵙게 되면서 자신의 흠결과 죄를 인식한다.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뵙다니!’하고 부르짖는다. 이토록 극적인 영광스런 환상을 보게 될 줄이야!
하나님 앞에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이사야를 하나님께서는 스랍 천사 하나를 시켜서 그의 입술을 정화시키며 죄를 용서하신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졌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죄와 흠결에서 벗어난 4번 유형 이사야는 하나님의 정의를 향하여 일어선다.
2. 소명에 응답하는 이사야
벤자민 웨스트 Benjamin West가 1732년에 그린 성화 ‘숯불로 정화된 이사야’는 이사야가 경험한 영광스런 환상의 극적인 순간을 묘사한다. 실로 이사야와 유다에게 중대한 순간이다. 4번 유형은 자신의 죄와 흠결이나 오류를 인식할 때 위축되기 쉽고, 침잠하거나 심하면 우울감에 사로잡힌다. 그만큼 통렬한 자기비판이나 성찰에 이른다. 그러나 환상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스랍 천사를 통하여 입술이 정화되며 용서의 은총을 경험할 때, 대속과 해방을 경험하면 누구보다 객관적이며 통찰력과 직관력이 강해지며 원칙이 선다. 평소에 자기이해와 정체성에 대하여 고민할 만큼 정신적으로 천착하거나 방황하던 4번 유형이 해방과 통합을 경험하게 되면 건강한 에니어그램 1번 유형처럼 원칙과 정의를 세우면서도 침착과 평정을 살려서 균형을 이룬다. 그래서 높은 분별력으로 역사를 인식하고 하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자각과 결단을 새롭게 한다.
용서와 대속의 은총을 경험한 이사야가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 인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평소 잘 느끼던 면제의식과는 대조적으로, 이사야가 말한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이사야 6:8). 역사적 소명의 패러다임이다. 예배신학이나 선교신학, 그 어느 쪽에서도 빼어난 소명에 대한 응답의 전형이다.
남달리 개인주의 특성이 강한 4번 유형이 타인에 대해서나 특히 사회에 대하여 무관심하기 쉽다. 그러나 변화된 4번 유형은 성숙한 자기이해와 정체성의 바탕에서 사회정의에 대하여 깊은 관심과 책임감을 갖게 된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었을 때, 평소에 간과하기 쉬었던 종교적 부조리와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예리하게 비판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형식적인 종교 의식에 치우치는 사람들의 위선과 타락이 누구보다 잘못과 결함에 대하여 민감한 4번 유형의 이사야에게 심각하게 비쳤을 터인데, 게다가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내며 예언하는 이사야에게 더욱 크게 비쳤을 것이다.
같은 인성과 성격의 특성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서도 각기 배우고 경험하고 자란 배경에 따라 눈높이가 다르다. 이사야는 귀족이며 왕이 친척이고 아버지는 예언자였으며, 그 자신이 역사가로서 궁중 서기관을 지낸 배경 때문에 이사야의 눈높이는 사회 문제와 정치, 그리고 국제 정세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인정될 만큼 탁월하였다.
소명에 응답하는 이사야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바로 하나님의 시각을 반영한다. 개인의 죄와 종교의 타락과 사회의 불의와 국제 관계의 불균형 등에 대하여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동맹을 통하여 유다왕국이 위기를 겪었고, 특히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략하며 포위하였을 때 유다왕국은 존폐의 위기에 놓였다.
앗시리아 왕이 보낸 편지를 주님 앞에 펼쳐놓고 기도한 히스기야 왕에게 이사야는 산헤립이 ‘입에 재갈을 물려 왔던 길로 되돌아가게 하겠다’고 예언하면서 ‘유다 사람들 가운데서 난을 피하여 살아 남은 사람들이, 다시 땅 아래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이사야 37:31).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한 이사야는 자신의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구원이시다’ 라는 확신을 가지고 역사를 통찰하고 직관하면서 탁월한 예언자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4번 유형이 대속과 해방의 은총을 경험하고 통합과 성숙이 이루어지면 직관력과 창의적 상상력이 신기할 정도로 높아지는 예를 보여준다.
3. 심판을 예언하는 이사야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4번 유형 이사야는 평소에 자기 자신의 삶속에서 흠결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무결주의가 강하였다. 이제 하나님을 만나 용서의 은총을 경험하고 소명을 새롭게 하며 통합된 정체성을 세우게 되었다.
감정의 균형과 침착성을 지닌 4번 유형 이사야가 자신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백성과 연대성으로 이어진다. 개인에게 흠결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자세가 이제는 공동체의 흠결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발전한다. 더욱이, 단순한 무결주의가 아니라 일과 삶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의지가 하나님의 정의와 만나면서 강박관념으로 작용하기 쉬었던 ‘진정성’이 하나님의 정의를 표상으로 하여 승화된다.
이와 같은 바탕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을 깨우기 위하여 심판을 예언한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용서의 은총을 받고 소명을 감당하게 된 자신의 경험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의 경험으로 이어지기를 열망하게 된다.
4번 유형 이사야가 자신의 무결주의적 태도에서 완성도를 향한 통합의 과정으로 옮겨진 경험이 유다 백성의 경험으로 확대되는 비전을 본 것이다.
형식적인 제사에 나타난 위선은 누구보다 4번 유형의 눈에 날카롭게 비쳐진다. 이사야가 보는 것보다 더욱 예리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비쳐졌을까를 동시에 환상으로 본다. 심판을 예언하는 이사야는 따라서 이스라엘의 위선과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역겨워’ 하시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야말로 ‘완전무결’이란 개념이 하나님의 자리에 놓였을 때 극치를 이룬다. 통합된 4번 유형의 눈에는 직관과 통찰의 예지가 번뜩인다. 더욱이 하나님의 눈에 비쳐진 유다 백성의 죄가 객관적으로 보이니까 이사야가 통렬하게 심판을 선언하게 된다.
진정성과 아울러 완성도를 추구하는 4번 유형들에게는 형식과 내용이 균형과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누구보다 못 견딜 만큼 거부감을 느낀다. 이런 이사야에게 유다 백성이 하나님 ‘앞에 보이러’ 오고, ‘헛된 제물’을 가져 오고,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역겨워’ 하시고, ‘싫어하시고’,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어’ 하시는 것을 이사야가 대변한다.
이런 종교현상이 어떤 사회현상으로 이어지는가는 역사를 보는 눈을 뜬 사람들은 미래지향적인 역사의식으로 예측할 수 있는 법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고, 들려주시는 신탁의 말씀을 듣는 이사야는 자신의 예지와 영성을 통하여 리얼리티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이사야 같은 4번 유형의 예술성이 영성과 조화되면서 예언은 시적 환상과 언어로 표출된다.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 주시고 신탁의 말씀을 들려 주셔서, 그 환상을 보고 신탁을 듣는 사람이 그때까지 쌓아올린 성격과 식견이 어우러진 인격과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 영성과 어우러진 소명이 어떤 수준이냐에 따라서 이해와 경험과 표현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결국 예언자의 눈높이 CE⁴-Level에 따라서 신탁과 예언의 함수관계가 규정된다.
(눈높이 CE⁴-Level는 See-Level, 곧 가치관이 형성되는 과정과 배경에는 문화 Culture, 교육 Education, 경험 Experience, 환경 Environment 그리고 기대 Expectation 등 다섯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
4번 유형 이사야의 예언은 유다 백성의 배신과 거부가 사회적 문제로 뿐 만아니라 국제관계에서까지 나타날 것을 내다보고 심판을 예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내면을 꿰뚫어보는 직관력으로 내적 영성의 중요성이 어떤 것인가를 밝혀준다.
4, 희망과 평화를 선포하는 이사야
에니어그램 4번 유형 이사야 예언자의 진정성과 하나님의 정의가 동시에 유다 백성의 죄를 역력히 드러내며 심판을 예언하게 하였다. 인격과 소명의 조화를 통하여 영혼의 코드 The Soul's Code를 찾은 이사야가 마침내 하나님 안에서 찾은 자신의 정체성과 용서받은 유다 백성과의 연대성의 조화를 통하여 이사야는 희망과 평화를 선포한다. 샬롬에 대한 상상력 Shalom Imagination이 평화에 대한 비전으로 옷 입으면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적 예언이 시어로 표현된다. 말로 그리고 펼치는 샬롬의 화폭이다.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의 일이요, 용서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To err is human. To forgive is divine. 라는 말이 실감나도록 죄의 심판은 유다에게 내려졌지만 하나님은 용서의 은총으로 평화를 선포하게 하신다. 그것도 영원한 평화가 선포되는 것이다. 용서의 은총과 샬롬을 발견한 이사야의 희열이 ‘샬롬 상상력’의 절정을 이루는 모양이다. 샬롬의 완성을 환상 속에서 본 듯하다.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올 것에 대하여 얼마나 아름다운 상상이 펼쳐지는가!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 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이사야 2:2).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을 예언한다. 평화의 비전과 예언의 패러다임이다. 이는 미가서의 예언에서도 반울림 되어 나온다.
더욱이 이사야 예언의 수월성은 역시 메시야 예언이다. 영원한 평화를 이루실 ‘평화의 왕’이 오실 것을 이사야 9장에서 예언한다. 그가 세우실 평화의 나라를 예언한다(이사야 11장). 그러나 여기까지는 어떤 예언자도 선포할 수 있는 예언일지 모른다. 이사야는 다르다. 고난 받는 종에게 부치는 노래가 탁월하다.
에니어그램 4번 유형 이사야 예언의 특유성이 여기서 나타난다. 누구보다 상처와 고난에 대하여 깊이 통찰하고 이해할 뿐 아니라 깊은 이해가 있는 4번 유형 특유의 경험과 표현이 나타난다. 4번 유형의 비전과 소명이 고난과 상처를 통하여 대속과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예언한다. ‘상처받은 치유자’ Wounded Healer가 메시야 상으로, ‘고난 받는 종’ Suffering Servant(이사야 42장)이 구원자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4번 유형 이사야가 만든 평화 환상곡은 아름다우면서도 처절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승화되는 평화의 리얼리티이다. 먼 훗날 메시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구원과 영원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리얼리티가 여기 이사야의 ‘샬롬 상상’에 비쳐지고, 평화 환상곡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통합된 건강한 4번 유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이사야가 보여주는 온전함의 영성 spirituality of wholeness 즉 통전적 영성은 이사야서 전체를 통하여 평화 환상곡으로, 평화의 대하드라마로 펼쳐진다. 하나님을 제 주인으로 알지 못하면 죄에 빠져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인의 죄와 백성/공동체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의 은총을 경험하면 하나님이 세워주시는 평화의 나라를 물려받고 샬롬을 온전히 누린다.
구원의 은총과 평화를 누리려면 평화의 비전이 높은 뜻과 비전으로 살아나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난 받는 종’과 더불어 고난을 견디기까지 해야 한다. 고난을 ‘필요한 고난’으로 받아드리고, ‘자발적 고난’ Voluntary Suffering으로 견디는 전범(典範) paradigm이 뚜렷하게 선다.
에니어그램 4번 유형이 드러내는 진수다. ‘상처가 축복’ Blessure(상처 프랑스어)이라는 말을 하는 4번 유형의 프랑스 문화와 이사야의 상처에 대한 뜻이 통한다. 상처는 치유되고 극복되면 복이다. ‘고난 받는 종’에 부치는 이사야의 노래가 4번 유형 이사야가 하는 예언의 보석과 같다.
출처 : 공동체성서연구원 김영운 목사님
벤자민 웨스트 그림 ‘숯불로 정화된 이사야’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altazor1/50088135808
알따소르 님 altazor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주님,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주를 높이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주께서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고,
예전에 세우신 계획대로 신실하고 진실하게 이루셨습니다.
(이사야 25:1 표준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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