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5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1과 신앙과 행동의 일치 곽만영

나효선 2015. 11. 27. 00:45

기독교대한감리회 2015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1과 신앙과 행동의 일치

곽만영

 

* 성경봉독 : 야고보서 2:14~26

* 참고성경 : 요한1서 3:18

* 요절 :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야고보서 2:22)

 

 

서론

11월의 인물은 곽만영입니다. 그는 정동제일교회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장로였습니다. 전도사로 활동했지만 사례를 받지 않고 헌신하는 봉사의 개념으로 하였습니다. 그는 신앙실천을 강조하였고, 모범을 보였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과시적인 방법이 아니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였습니다.

 

 

본론

곽만영은 1904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문막상고를 졸업한 후 제약회사에서 근무하였습니다. 1929년 어느 날, 하나님의 도움을 갈망하며 정동제일교회에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그 후 김영섭 목사와 김종우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1932년에 김영섭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하였고, 설교 제목과 설교자 이름을 붓글씨로 크게 써서 교회 정문 옆에 붙이는 일도 했습니다.

 

일제 말기 정동제일교회의 엡웟청년회가 무산아동을 위한 야간학교를 개설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엡웟청년회의 교육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교장직도 맡아 야간학교를 주도적으로 운영하였습니다. 야간학교는 가난해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청년들을 민족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기 위한 학교였습니다. 약 70명의 학생들에게 한글과 일어, 산수와 음악, 그리고 성경을 가르쳤으며 1943년까지 5년 동안 운영되었습니다.

 

해방 후 그는 신창균 장로와 함께 하던 조선성냥회사 상무이사직을 그만두었고, 출세의 길도 거부하면서 정동제일교회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합니다. 세상 나라보다는 하나님 나라 섬기는 것을 우선시하였고, 1950년 3월부터 25년 동안 전도사로 시무하였습니다. 얼마 후 6·25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자 대부분의 교역자와 교인들은 피신하였고 교회예배도 중단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주일이면 빠짐없이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정동제일교회였습니다. 이 당시 상황을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우리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예배를 봤다. 따발총을 둘러메고 눈알이 빨개 번득이는, 내 아들보다도 손자보다도 어린 인민군들의 감시 하에 예배를 봤다. 자연히 교인수도 많지 않았다. 30~40명 정도 모여서 예배를 봤다. 내가 사회를 봤고, 김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셨다. 할 말을 마음대로 못하는 사람의 서러운 듯도, 아픈 듯도 한 야릇한 가슴을 헤아려 보시라. 이보다 더 복통할 일이 있다. 강단 양쪽 벽에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걸어놓고서 예배를 봐야만 했다. 일제의 황국신민서사보다도 더한 처사였다.”

 

9월 28일 서울이 탈환되었으나 교회 안에는 전에 없던 새로운 대립이 일어났습니다. 피난 갔던 사람(도강파)과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재경파)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도강파는 재경파를 공산당의 협조자로 모는 반면, 재경파는 불가항력적이었다고 변명하며 무책임한 도망자들을 반박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시비 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살인의 비극까지 동반했습니다. 그 하나의 현장을 목격한 그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9·28수복 후 예배를 드릴 때마다 기쁨과 환희의 눈물을 마냥 흘렸다. 첫 예배를 마치고 감격이 가시기 전에 김인영 목사께서는 나와 어디 좀 함께 가자고 하셨다. 따라나섰다. 향촌동 청년자위대가 있는 곳이었다. 지금 관상대 뒤꼍이었다. 흙더미 한 곳을 지적하시면서 ‘이곳을 함께 파십시다.’ 나는 의아했다. ‘내 아들이오. 어제 낮 친구들의 오해로 부역자로 몰려 총살당했소.’ 기가 막혔다. 가슴이 콱 치밀고 코허리가 찡해왔다. 이럴 수가 없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었다.”

 

그 후 전세가 역전되자 곽만영도 피난을 갔습니다. 1951년 3월, 서울이 다시 탈환되었으나 민간인의 서울 출입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 상황이 걱정되었던 그는 7월 15일 부산에서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그는 화물차편으로 노량진에 도착하여 하루를 지낸 다음날 서울 시내로 향했습니다. 헌병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겨우 특별 입성 허가를 받아 한강을 건넜습니다. 폐허가 된 서울 거리를 지나서 정동제일교회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정동제일교회의 상징과도 같았던 파이프 오르간이 파괴되어있는 등 교회의 상황은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당시 목격한 것을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쑥과 망대가 내 키를 넘게 자라 있었다. 마구 헤치면서 교회당에 들어갔다. 기가 막혔다.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주님의 섭리를 더욱 헤아리기 힘들었다. 강단이 폭격을 맞아 폭삭 무너져 내려앉고, 파이프 오르간이 망가져 있었다. 파이프가 휘어지고 부서져 파편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교회는 절반이 파괴되고, 목사관도 날아가고 없었다. 처참한 정경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정상적인 모습으로 복구하기 위해 그는 있는 힘을 다하였습니다. 우선 7월 18일의 주일예배를 위해 교인 몇 사람과 함께 무너진 교회당의 한 쪽을 치우고 예배 준비를 했습니다. 주일 11시에는 예배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종탑에 올라가서 힘껏 종을 쳤습니다. 그리고 11명이 모여 감격스런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후에 그는 부산에 있는 김인영 목사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편지로 전했습니다. 폐품이 된 오르간을 고철로 팔아 교회 부속 건물의 일부를 수리하여 담임목사의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이후 곽만영은 잠시 이태원교회를 맡아 담임전도사로 시무하기도 했으나 1954년부터 다시 정동제일교회로 복귀한 후 1976년 4월 ‘곽만영 전도사 성역 25주년 찬하 예배’를 드리고 은퇴하였습니다. 그는 전도사로 시무했으면서도 목사안수를 받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은퇴 후에도 장로로 역할하면서 1992년 11월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가산을 통째로 하나님께 바쳤고, 교회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남양주시 수동의 정동수양관에 만영홀을 설치하였습니다.

 

 

결론

곽만영은 방황하던 청년 시기에 정동제일교회에서 자신의 길을 찾았습니다. 그 이후 그는 한 번도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고 배운 대로 실천하며 정동제일교회와 함께하였습니다. 그랬기에 그의 삶은 정동제일교회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신앙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였고, 모범을 보였기에 ‘살아 있는 성자’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는 온 나라가 가난하던 시절 거리에서 추위에 떠는 이들을 보고 자신에게 도와줄 것이 없자 입던 바지를 벗어 주고 속바지 차림으로 귀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숨겨진 사랑의 헌신이 사후에서야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에 의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17)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2.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는 것이 어떤 종류의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5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