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5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2과 한국의 첫 여성 법조인
이태영
* 성경봉독 : 누가복음 4:16~21
* 참고성경 : 마태복음 9:35~38
* 요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 4:18~19)
서론
올해 마지막으로 살펴볼 12월의 인물은 이태영입니다.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 붙는 그의 삶 자체가 한국현대 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합니다. ‘여성 최초’라는 것으로 높은 지위와 명예, 권력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이것들을 다 내던지고 가장 힘없고, 가장 눌린 사람들의 벗이 되었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첫 여성 법조인’이라는 호칭을 단순한 직업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평생의 책임과 사명으로 받아들여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본론
이태영은 1914년 평북 운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광산업을 하던 아버지가 첫돌 직후에 별세하여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하였습니다. 영변의 소학교와 숭덕여학교를 마친 후 평양으로 나와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를, 그리고 이화여자전문학교를 1936년에 졸업하였습니다. 1935년 11월에는 서울중앙기독교청년회 (YMCA)가 주최한 ‘여자전문학교 학생웅변대회’에서 1등상을 받았으며, 졸업 후 평양고등성경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평양 남산현교회의 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1936년 12월 평양에 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던 정일형 전도사와 결혼했습니다. 그 후 정일형이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해방 직전 고향 운산으로 이주하였다가 같은 해 12월 말 향리를 떠나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1946년 서울대학교에 남녀공학제도가 선포되면서 서울대학교 첫 여학생으로 법과대학에 진학하여 1949년 7월 졸업하였습니다. 1952년 12월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사법시험 역사상 첫 여성 합격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김병로 대법원장은 이태영의 판사 임명을 건의했지만 야당 정치인의 아내라는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이 거부하여 법관으로 임용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어 곧바로 여성권익 향상을 위 한 여성운동을 시작하였고, 이 일을 평생의 과제로 생각하였습니다. 먼저 여성차별적이며 유교적 인습이 남아 있는 가족법 개정운동과 호주제 폐지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자 “법조계 초년생이 뭘 안다고 법을 고치려 하느냐”,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킨다”라는 법조계의 비난과 유학자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싸워가며 가족법 개정 캠페인과 홍보활동을 했고 호주제도의 위헌성과 위법성을 주장하며 호주제 폐지 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그 결과 1989년 12월 3차 가족법이 개정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2005년 3월 2일 호주제 폐지를 골간으로 하는 민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그가 폐지운동을 시작한 지 53년 만에 호주제는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그 소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족법이 개정되었습니다. 오백년 묵은 인간차별의 벽이 무너졌습니다. … 주위의 많은 분들이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으니 축하한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성이 새로운 것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제 자리’를 찾았을 따름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람 노릇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더군다나 가족법이 ‘여성법’은 아니지 않습니까. ‘가족 모두의 법’이잖습니까.”
1956년에는 ‘여성법률상담소’(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설립하여 법률 지식이 부족한 여성과 어린이, 청소년들이 가정에서 당하는 불이익을 최대한 줄이고 이들을 보호하는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1976년에는 국내외 여자 정치인 및 여자 지식인 100명의 서명, 동의, 지원을 얻어 서울에 여성 운동가들의 회관인 ‘여성백인회관’을 건축하였습니다. 여성백인회관은 여성을 위한, 여성의 집을, 여성의 힘으로 짓겠다는 일념 하에 뜻있는 여성들에게 한푼 두푼 기금을 모아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1995년 병으로 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이 땅의 가난한 자, 억울한 자, 불행한 자, 약자를 위한 본격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1962년에는 가정법원 설치 운동을 시작하여 정부에 가정법원 설치를 제안하였습니다. 그 결과 1년 만인 1963년 가정법원을 기존의 법원에서 독립하여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1963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학 교수 겸 학장이 되어 1971년까지 학생들을 지도하였으며 법학 외에 여성 참정권 등의 과목도 개설하여 가르쳤습니다. 1969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이혼연구”란 논문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1년 5월에는 그와 남편 정일형 박사가 함께 드루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는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또 이태영은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유신체제가 들어서자 한국교회는 1973년 “교회가 인권확립을 위해 책임을 다하려 한다” 는 ‘인권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속 조치로 인권 문제를 다루는 상설 기구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를 1974년에 조직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에 적극 참여하였고 다들 맡으려 하지 않았던 위원, 부위원장 등을 기꺼이 맡아 활동하였습니다. 1976년 3월 1일에 발표된 ‘민주구국선언’에도 연루되었고, 이로 인해 1977년에 3년 징역, 3년 자격정지의 실형이 선고되고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여성의 권익과 민주화를 위한 활동으로 그는 막사이사이상(1975년), 세계감리교협의회 평화상(1984년) 등 세계적인 상을 수상하였고 국내에서도 국민훈장 무궁화장(1990년), 3·1문화상(1992년) 등 수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서울 남산교회 권사로 헌신하면서 대한 YWCA 연합회 실행위원, 감리교여선교부 명예회원, 세계감리교 총회(1993년)에 참석하여 주제 강연을 하기도 하는 등 교계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말년에는 치매로 오래도록 고생하다가 1998년 12월 17일 별세하였습니다. 저서로 「한국이혼제도연구」「 차라리 민비를 변호함」「가족법개정운동 37년사」 등과 유고집 「정의의 변호사가 되라 하셨네」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역서들도 있습니다.
결론
이태영은 우리나라의 첫 여성 변호사입니다. 그는 40여 년의 세월 을 한결같이 힘없는 여성들의 인권과 고난 받는 이들의 변론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이 땅의 고난 받고 소외된 여성의 어머니 가 되었습니다.
이태영은 사랑과 열정으로 잘못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자였습니다. 상처받고 차별받는 이웃들을 위해 변론했고, 불의한 힘과 권력이 지배하는 시대에 맞서 저항하며 정의를 지켜내기 위해 헌신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바로 한국여성의 현대사가 되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2015년의 한 해 동안 우리와 우리 선교회, 그리고 우리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어떻게 감당했는지를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2. 이 땅의 가난한 자, 불행한 자, 억울한 자, 약한 자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5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Ⅲ
집필자 : 조이제 목사
중앙연회 여주서지방 여주소망교회 담임
한국기독교역사학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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