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5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0과 하얼빈 사건의 공모자 우덕순

나효선 2015. 10. 27. 01:00

기독교대한감리회 2015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0과 하얼빈 사건의 공모자

우덕순

 

* 성경봉독 : 로마서 8:18~30

* 참고성경 : 하박국 2:12~14

* 요절 :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마서 8:21)

 

 

서론

10월의 인물은 우덕순(혹은 우연준)입니다. 그는 상동교회에 출석하면서 민족의식을 지니게 되었고, 을사늑약 이후에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일제에 직접 대항하는 무장투쟁의 길에 나섰습니다. 이런 같은 투쟁 속에서 안중근을 만나고, 서로 의기투합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로 하였습니다. 결국 안중근이 저격에 성공하여 이름을 날리고 우덕순은 잊혀졌지만 이 사건은 우덕순과 안중근이 함께 추진한 사건이었습니다.

 

 

본론

우덕순은 1876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습니다. 4~5세 때 서울로 올라와 동대문 안 양사동(종로6가)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는 서당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통감 등을 수학한 후 아버지가 운영하던 잡화상을 이어받아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이처럼 평범한 생활을 하던 그는 기독교에 입문하면서 민족운동가로 변합니다.

 

우덕순은 1904년경 상동교회에 출석하면서 새로운 사상을 갖습니다. 당시 상동교회에는 전덕기 목사의 지도를 받는 상동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들과 교류하며 민족정신을 기르고, 또 상동청년회 활동을 통해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민족운동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우덕순은 국내에서는 활동할 여지가 거의 없음을 깨닫고 해외로 망명해 국권회복 투쟁을 결심하였습니다. 그해 겨울 그는 칠순의 노모와 처자식을 남겨 두고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해 동지들의 재정 지원으로 1906년 계동학교를 설립하고 조국광복을 위한 청년교육 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전 북간도 관리사 이범윤과 연락하여 의병 1천여 명을 모아 러시아령 연추에 훈련소를 만들어 항일 전투력을 강화하였습니다.

 

1908년 여름에는 300명의 정예용사와 국내에 잠입하여 함경북도 경흥·회령 지방의 일본군영을 습격하다가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7년형을 선고받고 경흥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탈출하여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습니다. 1909년 봄에는 연추에서 안중근 김기열과 함께 단지동맹을 결성하여 결사보국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연준’으로 개명하고 담배행상을 하며 블라디보스토크 각지를 왕래하면서 한국국민회가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발행한 신문 <대동공보>의 모금 및 동지간의 연락을 담당했습니다.

 

그해 10월 20일 우덕순과 안중근은 대동공보사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토를 암살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다음 날 2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우덕순과 안중근은 중간에서 유동하를 통역으로 합류시키고, 22일 밤 9시에 하얼빈에 도착해서 김성박의 집에서 유숙하였습니다. 23일에는 우덕순 안중근 유동하 3인이 사진을 찍었고, 마지막으로 조도선을 합류시켰습니다. 그리고 하얼빈 김성박의 집에서 그와 안중근은 함께 결의를 다지는 시를 지었습니다. 먼저 안중근이 9언 절귀 한시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불렀고, 이어서 우덕순이 한글 4.4조 민요 형태의 시조 ‘보구가’(報仇歌, 원수를 갚는 노래)로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는데 이 시에서 그의 민족주의 신앙의 실체를 읽을 수 있습니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너를 만났도다 / 너를한번 만나고자 일평생에 원했지만 / 하상견지(何相見之) 만야(晩也)런고 너를한번 만나려고 / 수륙으로 기만리를 혹은윤선 혹은화차 / 천신만고 거듭하여 로청양지(露淸兩地) 지날때에 / 앉을때나 섰을때나 앙천하고 기도하길 /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예수여 살피소서 / 동반도의 대제국을 내원대로 구하소서 / 오호간악(嗚呼奸惡) 이도적아 아등민족 이천만을 /멸망까지 시켜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 소리없이 뺏노라고 궁흉참악(窮兇慘惡) 저수단을 / (중략) / 지금네명 끊어지니 너도원통 하리로다 / 갑오독립 시켜놓고 을사체약 한연후에 / 오늘네가 북향할줄 / 나도역시 몰랐노라 / 덕닦으면 덕이오고 죄범하면 죄가온다 / 너뿐인줄 알지마라 너의동포 오천만을 / 오늘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보는대로 / 내손으로 죽이리라”

 

거사를 확실히 하기 위해 채가구 역과 하얼빈 역을 거사장소로 정한 두 사람은 정착 가능성이 더 높은 하얼빈 역으로 서로 가겠다고 고집하였습니다. 결국 우덕순이 채가구 역에,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 대기하였습니다. 이토를 태운 기차는 채가구 역에 잠시 정차했다가 곧바로 지나쳐 갔습니다. 그리고 채가구 역과 인근 집의 모든 문을 폐쇄하고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시켰습니다.우덕순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로써 이토 저격은 안중근이 행한 것입니다.

 

그 후 우덕순도 체포되어 국경지방 재판소에서 수일간 심문을 받은 후 일본총영사관 경찰서로 인계되었고, 다시 여순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호송되었습니다. 1910년 2월 22일 우덕순은 6회에 걸친 공판에서 3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이토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 장벽을 만든 사람이다. 내가 이 장벽을 없애버리려고 한 것은 전부터 갖고 있던 생각이었기 때문에 본 사건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밖에 별 할 말이 없다”고 당당히 소신을 밝혔습니다. 그해 9월 여순감옥에서 경성감옥으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08년에 탈옥한 것이 탄로나 다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 후 사면을 받아 1915년 2월에 출옥하였지만 일경의 감시 때문에 5월에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습니다. 하얼빈 치치하루 만주리 납하리하 등 각지를 왕래하면서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였고, 교포들과의 연락과 제2세 교포들을 위한 육영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민족운동에 전념하였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제의 세력이 만주 전역에 뻗쳤을 때, 그는 요시찰인으로 감시를 받아 수차례에 걸쳐 투옥 당했으나 굴하지 않고, 장로로서 교회를 근거 삼아 우리말 보존에 헌신하였습니다. 1945년 8월에도 일본헌병에 검속 당했으며 해방과 동시에 출감하여 흑룡강성 한인민단 위원장에 추대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교포들을 고국으로 수송하는 일에 주력하였습니다.

 

1945년 12월에 귀국하여 건국사업에 투신하였습니다. 1949년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에 피선되어 정치 일선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 9월 26일 공산군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추서되었고, 1968년 9월 국립묘지 서울 현충원 애국열사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결론

우덕순은 상동교회에서 민족적인 신앙을 배운 후 시베리아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는 이곳을 근거지로 독립투쟁을 전개하였고, 이토 히로부미의 러시아 순방 소식을 듣고 그를 제거하기로 하고 안중근과 하얼빈으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하일빈 역을 맡았지만 안중근이 하얼빈 역을 맡겠다고 하여 장소가 바뀌었습니다. 그 후 안중근의 거사가 성공하였음을 알게 된 그도 “까레이시케우라”(대한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활동은 잊혀졌다가 최근에서야 알려졌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기독교인이 민족적 원흉을 제거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악을 제거하기 위해 기독교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5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