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5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9과 20세기 종로의 성자 현동완

나효선 2015. 9. 5. 01:35

기독교대한감리회 2015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9과 20세기 종로의 성자

현동완

 

* 성경봉독 : 마태복음 5:3~12

* 참고성경 : 요한복음 21:15~17

* 요절 :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9)

 

 

서론

9월의 인물은 현동완입니다. 그는 전 생애를 YMCA와 더불어 산 기독교 청년운동가입니다. 간사로 부임한 이후 부총무, 주임간사, 총무 등의 직책을 맡으면서 죽을 때까지 40 년간을 YMCA와 함께 하였습니다. 특히 해방 후 YMCA을 재건하고 6·25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는 중요한 일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전의 YMCA의 사회활동 방향과 다른 경건주의에 바탕을 둔 활동을 하였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활동으로 YMCA는 또 다른 방향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본론

현동완은 1899년 서울 마포구 현석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916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18년 서울YMCA 체육부 간사로 부임하면서 이후 별세하기까지 평생을 YMCA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1920년 6월 신흥우는 윤치호의 뒤를 이어 서울YMCA 총무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일본YMCA에 예속되어 있던 한국YMCA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 실무진을 지도층 인사들로 구성하였고, 실무자를 해외에 파견하여 훈련시키는 인재양성에도 나섰습니다. 현동완은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YMCA에 파견되었습니다. 당시 클리브랜드청년회는 무디 이후 YMCA 전도운동의 선봉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4년 동안 수습기간을 가져 장차 YMCA 지도력의 근본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현동완은 퀘이커교도들과 깊이 사귀게 되었고, 멀리 벽지의 수도원을 즐겨 찾았습니다. 이로써 그의 인생관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고, 경건주의 기조의 사회적 관심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현동완은 1926년에 귀국하였습니다. 당시가 “복음의 사회화운동”이 한참 진행되던 때였지만 그는 이와 대조되는 경건주의 운동을 태동시켰습니다. 곧 YMCA 소년들로 구성된 ‘평화구락부’(Peace-makers’ Club, PMC)라는 클럽을 창설한 것입니다. 매주 금요일에 정기집회를 갖고 평화의 이름 아래 개인수양과 사회봉사의 훈련을 받도록 했는데, 수련내용은 금요기도회(기독교 신앙지도), 등산(호연지기를 기른다), 도보여행(인생경험을 쌓는다), 근로봉사(매 주일 한 가지씩 실천), 구제활동(크리스마스 동정메달 판매) 등이었습니다. 매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1월 11일에는 평화기념식으로 모여 “평화의 뿌리는 마음에 심고 평화의 열매는 몸으로 거두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평화의 정신을 기리는 대규모 행사를 거행하였습니다. 또 연말에는 YMCA 본관 로비에 “동지야, 빈민을 위하야 3 일간 노상에서 걸인이 되자”라는 격문을 내걸고 메달(1개 5전)을 팔아 그 수입으로 구제활동을 하였습니다. 1930년 보고에 의하면 800여 원을 모아 서울인근 극빈자 400여 호에 전달하였습니다.

 

1932년에는 서울YMCA의 부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진행되던 평화주의적 사회봉사활동을 “참”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이로써 참 운동은 전 연령층을 망라한 서울YMCA의 가장 역점적인 종합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그의 간청으로 시작된 유영모의 ‘금요강화’는 이 운동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시즌의 ‘동정메달’ 구제활동은 지방으로 확대되면서 참 운동이 점차 YMCA의 또 하나의 지도노선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935년 5월 현동완은 한국YMCA연합회의 순회간사, 실질적 총무가 되었습니다. 현동완은 한국YMCA의 새로운 활로를 열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 하였습니다. 그는 원산 함흥 등 각 지방을 출장하여 지방지도자들과 수습책을 협의하였습니다. 이듬해 1월에는 기독교청년회 대표위원 수양회를 열어, 일체의 사회활동은 중지하고 회원의 종교적 수련과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와 불우한 이를 위한 봉사활동에 역점을 두는 정책을 제시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전국적으로 “참” 운동을 전개하였고 클럽활동 위주의 소년사업을 장려하여 봉사와 구제사업을 폈으며, 삼동회 등 구제사업을 운동화하여 새 활로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비전을 결여한 수도지향적 경건주의만으로는 청년회의 침체를 극복할 수 없었으며 이내 청년회 지도층의 비평적 저항에 부딪쳤습니다. 또한 극도의 불안을 자아내던 정치 경제적 상황 속에서 일반사회의 호응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1937년 7월 연합회 순회간사직을 사임하였고, 이후 함북지방에 은둔하였습니다.

 

해방 후 미군정청 교통부장 고문으로 일했던 그는 1948년 6월 재건된 서울YMCA 총무로 취임하였습니다. 그의 취임은 서울YMCA의 정통성 확립과 연결이라는 사실에서 중대한 의미는 갖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각부 사업을 활발히 전개해 갔으며 특히 종교부와 소년부 활동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종교부는 “복음운동의 대중화”라는 기치 아래 매 일요일 3회의 신앙집회(유영모 한에녹 함석헌)를 열어 많은 청중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고, 소년부는 신앙운동 보이스카웃운동 소년평화운동 삼각소년회 어린이합창단 등을 조직하여 운영하였습니다.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하였다가 1952년 서울로 복귀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부랑 범죄 소년을 위한 삼동소년시(YMCA Boys’ Town), 윤락여성 선도를 위한 삼동부녀회관, 무산아동을 위한 무료중학교 등 복지사업을 서울YMCA의 주축프로그램으로 시행하였습니다. 특히 삼동소년시는 전쟁고아나 유랑하는 소년들을 양육하여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육성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현동완은 소년들의 아버지로 역할하며 “오며 감사, 가며 감사, 있어 감사”하는 마음을 항상 가질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서울YMCA 회관재건과 이념대립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57년 3월 총무직을 사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959년 12월부터 난지도 삼동소년시 단칸방에서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명예회원으로 추대되는 서울YMCA 60주년기념식(1963.10.28)을 사흘 앞두고 별세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삼동소년시 사업에 참여했던 황광은 목사는 그가 “20세기 종로의 성자” 였으며, “분명 그는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것도 천당 속에 높이 앉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시는 주님께 미친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생애는 YMCA라는 봉사단체에서 시작되어 병으로 눕기 수개월 전까지 40 년간을 청소년지도에 그 몸을 바친 것이다.” 라고 추모하였습니다.

 

 

결론

현동완은 YMCA을 사랑하고 YMCA 함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YMCA를 통해 경건주의에 근거한 평화운동과 참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운동으로, 회원에 대한 종교적 수련과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와 불우한 이를 위한 봉사활동에 역점을 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YMCA운동에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제 말기와 해방 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에 YMCA의 전통을 사수하는 데 힘을 다하였습니다. 특히 6·25전쟁 이후에는 전쟁고아와 부녀자들을 위한 구호사업에 주력하여 많은 공헌을 남겼기에 ‘고아의 아버지’ 혹은 ‘20세기의 성자’로 불렸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교회에서 할 수 있는 평화운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알아봅시다.

 

2. 기독교 영성과 사회봉사 활동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5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