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5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7과 헤이그 밀사
이준
* 성경봉독 : 갈라디아서 6:6~10
* 참고성경 : 마태복음 10:35~38
* 요절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서론
7월의 인물은 헤이그 밀사로 잘 알려진 이준 열사입니다. 그의 생애 초기에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전승받은 가풍과 전통적인 공부를 통해 유교적 세계관에 충실하였고 소극적으로 개화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04년 무렵부터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일제의 본질을 간파하게 되면서 여러 단체를 조직하여 항일애국계몽운동에 나섰고, 또 상동교회에 출석하면서 전덕기 목사 등을 통해 깊은 신앙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상동파 민족주의자들과 교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론
이준은 185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공부하였고 실력도 갖추었지만 유생들의 시기와 방해로 관직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경학원을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힘을 다하면서 정세를 관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5세 무렵부터 종래의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한국의 사회변화에 새롭게 대응합니다. 마침 당시에 개화파 내각이 조직되고 새로운 행정 제도로 사법권이 독립되면서 1895년 37세의 나이로 신설된 법관양성소에 들어갔습니다. 6개월 만에 제1기로 졸업하고, 한성재판소 검사보 주임 6등관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관직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조정 대관들의 비행과 불법을 적발하고 숙청한다는 이유로 고관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1개월 만에 파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의 전신인 동경전문학교에서 법학을 2년 동안 공부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서구 근대법학의 수용자가 되었습니다.
1898년에 귀국한 이준은 관직에 나가기보다는 국가를 바로잡기 위해 ‘독립협회’에 참여하였습니다. ‘만민공동회’의 가두연설에 나서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협회’가 해산당하여 그의 활동은 2~3개월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1902년에는 민영환 이동휘 이상재 등과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하는 데 관계하였고, 1904년 러일전쟁 후에는 ‘대한보안회’ ‘대한협동회’ ‘국민교육회’ 등을 조직하여 국민계몽에 힘쓰면서 황무지 개척권을 얻으려는 일제의 음모를 폭로하는 활동을 나섰습니다. 또 친일조직인 ‘일진회’를 배척하기 위해 1904년 12월 ‘공진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어 통상회와 특별회를 매주 토요일에 가지면서 회원계몽과 정부에 대한 시정개선활동을 하였습니다. 1904년 12월 24일에 타락한 정부의 대신을 성토하다가 체포되어 황해도 철도에 유배되었다가 황제의 특사로 1개월 만에 방면되었습니다. 그는 1905년 5월에는 애국계몽운동을 선도한 ‘헌정연구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헌정연구회’는 입헌정치체제에 대한 연구단체로 이후 조직되는 정치·사회단체나 학회의 선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준은 고난당하는 시기를 성경을 탐독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감옥에 갇혔던 양반들이 집단적으로 개종하고 풀려나 교회에 출석하던 무렵에 이원긍의 인도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연동교회에 출석하였고 집사 직분도 받았지만 교회를 정치생활의 피난처 정도로 생각하던 형식적인 교인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유배기간을 통해 성경을 읽으면서 ‘십자가의 피’에 대한 구속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1905년 초에는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모인 상동교회로 교적을 옮겼습니다. 그는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목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민족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깊은 신앙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주일이면 반드시 예배에 참석하였고 모든 생활에서 기독교의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1905년 11월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기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감리교 엡웟청년회 전국연합회는 상동교회에서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습니다. 그 결과 전국교회에서 참여한 청년들은 ‘을사늑약’ 무효상소운동을 결의하였습니다. 이때 이준은 상동교회 엡웟청년회 대표로 참석해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 무효상소를 위해 도끼를 어깨에 메고 대한문 앞으로 나가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를 올리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일본 경찰에 의해 무참히 저지당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전덕기 목사는 여러 동지들과의 의논을 통해 이 회의에 고종황제의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은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며 결코 한국 황제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려 조약을 무효화시키기로 했습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으로 특사를 선정하고 4월 20일에는 고종의 신임장을 비밀리에 받아냈습니다. 이 신임장은 이준에게 전달되었고 전덕기 목사는 먼 길을 떠나는 그를 위해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바로 이날 이준은 ‘대한자강회’의 초청강연회에서 청년들에게 민족의 생존을 위해 분발할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청년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며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나는 언제나 항상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큰 나라라 하는 것은 땅덩이가 크고 사람이 많은 것보다 위대한 인물이 나는 나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땅덩이가 손바닥만 하고 사람이 아주 적은 나라라 할지라도 이러한 나라는 큰 나라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준은 부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상설과 합류하였고, 이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을 만난 후 베를린과 브뤼셀을 거쳐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준 등 세 특사는 시내 바겐스트라트가 124번지에 소재한 호텔에 투숙하여 태극기를 내걸고 공개적인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와 각국 대표들의 냉담한 태도로 회의장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실정을 알리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이에 비분한 이준은 7월 14일 49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여 헤이그의 묘지에 묻혔습니다.
결론
이준은 정당한 법의 행사도 나라의 주권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체험한 인물입니다.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여러 단체들을 통해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권회복을 위한 실천행위로 기꺼이 헤이그 밀사가 되었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그의 유해도 1963년 10월 서울 수유리 묘지로 이장되었습니다. 감리교회에서는 2007년 그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인접한 도시인 레이드스헨담에 ‘이준 열사 순국 100주기 기념교회’를 세우고 그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휴가철에 교회나 교인과 관련된 유적지를 찾아보고 되새겨야 할
교훈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5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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