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5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6과 교육운동가
강매
* 성경봉독 : 디모데전서 4:6~11
* 참고성경 : 에스겔 22:17~22
* 요절 :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디모데전서 4:6)
서론
서론
6월의 인물은 강매입니다. 그는 교육자로 활동하면서 학생·청년운동과 문서운동에 평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배움의 중요성을 깨달은 후 스스로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는 모범을 보였고 이를 전하는 데에도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로 역할하면서 교회개혁을 이끌었고, 한국교회의 역사의식이 빈약함을 안타깝게 여겨 교회역사를 정리하는 일에도 중요한 기초를 놓았습니다.
본
본론
강매는 1878년 충남 천안의 청렴한 선비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25세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04년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에서는 정동제일교회의 최병헌 목사와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 등과 접촉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하고 정동제일교회 교인이 되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에 충격을 받은 그는 배워야 국권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먼저 서울 양잠학교를 졸업하였고, 1907년에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잡는다고 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법과와 고등사범 수법과를 졸업하였습니다.
1911년 귀국하는 길로 배재학당 교사로 취임하여 교무주임, 부교장 등을 역임하며 20여 년 간 봉직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교육하는 데 전념하였으며, 교육태도가 매우 진실하여 학생들뿐 아니라 동료교사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습니다. 1935년 6월 배재학교 창립 50주년 기념식 때에는 근속 표창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초창기 회원으로서 1914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제1회 전국대회에 참석하여 전국연합회를 창설한 것을 비롯해 학생YMCA의 지도자, 하령회의 강사, YMCA 이사 등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그는 정동제일교회의 충실한 임원으로 봉사했는데, 특히 1914년 11월에 있었던 현순 목사의 부흥회에서 크게 감화를 받아 거듭나는 ‘믿음의 문’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15년 7월에 그는 <정동교회 30년사>를 저술하였습니다. 그는 한국교회의 역사가 모호하고 “교회들의 실력이 아직도 박약하여 반석 위에 건축하지 못하고 재산은 외국선교사들에게 의뢰함이 태반이요 교우들은 정신상 연락이 좋지 못함”을 개탄하여 우선 정동제일교회의 연혁부터 집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목사들의 증언을 듣고 선교회 일기를 참조하여 집필을 하였습니다. <정동교회 30년사>는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개체교회사일 뿐 아니라,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 이화학당의 역사도 기록되어 있어 한국교회 초기 활동에 관한 귀한 자료로 평가받습니다. 1918년 5월 28~30일 최병헌 감리사의 사회로 피어선성경학원에서 열린 경성지방회에서 정동교회 전도사(장로)로 임명되어 평신도 지도자로서 활동하였습니다.
한편 1920년대에 들어와 한국교회는 새로운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일부 지식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를 비난하고 나선 것입니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의 기독교 비판은 교회를 공격하는 반기독교운동으로까지 확대 되었습니다. 이러한 비판과 공세에 대해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는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기독교인들도 있었고, 그들의 주장에 대해 어느 정도 타당성을 인정하는 기독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들의 비판을 계기로 교회가 자성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이때 정동제일교회에서도 교회의 반성과 혁신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강매를 비롯한 신흥우, 조병옥 등 평신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기독신보>(1925. 12. 30)에 발표한 글을 통해 그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은 특히 미국의 교파를 계승한 듯한데, 복음의 진리 즉 영적으로 신생하는 도리를 수수함보다도 그의 조직 또는 제도 하에 신음하는 듯이 보인다. 교회를 조직하는 것이 성결, 구속, 회개, 신생하는 도리보다 전제조건이 되는 듯이 보인다. 영적 깨달음이 있은 후에 회개가 있고, 회개가 있은 후에 신생이 있고, 신생이 있은 후에 기쁨이 있고, 기쁨이 있은 후에 비로소 교회가 있을 것이니, … 교회는 즉 하나님이 아니오, 교회 또한 하나님의 창조물 중의 하나인 까닭이다. 우리가 만일 교회의 조직 또는 제도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몰각한다 하면 이는 분명히 우상숭배일 것이다.”
강매는 배재학당 외에 상동청년학원에서도 가르쳤습니다. 상동청년학원은 1904년 10월 상동감리교회 전덕기 목사가 설립한 중등교육기관입니다. 설립 목적은 “하나님 공경하는 참 도로서 근본을 삼아 청년으로 말하여도 벼슬이나 월급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세상에 참 유익한 일꾼이 되기를 작정하자는 데” 있었습니다. 초대 교장을 맡았던 이승만은 “나라가 나라 노릇하자면 사람이 먼저 사람 노릇을 하게 되어야 하겠고 사람이 먼저 사람 노릇하자면 가르치고 배우는 데 있으니 대저 학교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요 또한 나라를 만드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학교 설립의 취지를 말하였습니다. 교사로는 전덕기 주시경 장도빈 최남선 남궁억 현순 조성환 이필주 이승만 유일선 고주연 박재욱 장지연 오의선 등 쟁쟁한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든 교과목을 통해 지식은 물론 민족혼을 불어넣는 교육을 시켰기에 이 학교를 통해 교회와 나라를 위한 일꾼이 배출되었습니다. 강매도 이 학교의 설립취지와 목적에 찬동하여 야간에 강의를 한 것이었습니다.
전덕기 목사가 죽고 1914년 상동청년학원이 운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자 밤 시간을 얻게 된 강매는 글 쓰는 일과 잡지를 발간하는 데 적극 나섭니다. 1914년 10월에는 월간지 <공도>를 발간하였습니다. <공도>는 종교·교육·사회개선을 삼대 강령으로 정의 공도에 기본 하여 인지의 개발과 사회 개선을 목표로 한 잡지로 5호까지 발간하였습니다. 1919년 1월에는 조선민족을 의미하는 <선민>이라는 월간지를 발간하였습니다. 또 한때 직접 언론계에 뛰어들어 <중앙일보>와 <시대일보> 등의 편집국장을 역임하였고, 「한문문법제요」, 「조선문법제요」, 「중등조선어작문」, 「법률요강」, 「잘 뽑은 조선말과 글의 본」(김진호와 공저) 등도 저술하였습니다.
1930년대 후반기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북간도로 건너가 연길농업실업학교 교장으로 5 년간 시무하면서 민족교육에 종사하였습니다. 1941년 6월 별세하자 북간도 동포들은 그를 사회장으로 모셨습니다.
결론
결론
강매는 교육자와 교회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은 인물이었습니다. 배재학당에서는 한글을 가르치면서 민족혼인 글의 중요성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습니다. 교회에서는 교회개혁에 나서면서 한국교인들이 선교사에게 의존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주체적 자립의식을 가질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강매는 교회역사의 중요성을 깨달아 정동제일교회 역사뿐 아니라 선교 초기의 역사를 정리한 선구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어와 에스페란토에도 만만찮은 실력을 자랑하였으며, 시와 수필을 쓰는 문학인이면서, 일본에서 정식으로 법학을 전공한 법학도이기도 하였으니 그야말로 박학한 지식인으로 손꼽히는 존재였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우리교회의 역사를 알아보고, 교회의 전통과 유산을 잇기 위해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지를 찾아봅시다.
2. 우리교회의 학생회와 청년회를 위해 남선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5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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